한때 인천의 문화는 '서울 종속적'이란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모든 게 서울로 통하던 시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때였다. 개항(1883년) 후 서양 문물이 인천으로 쏟아져 들어와 서울로 가는 과정에서 문화 역시 부흥을 맞이하긴 했다. 국내 최초의 공연장인 협률사(協律舍) 등 지역 문화를 대표할 시설도 많았다. 하지만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인천은 '문화 불모지'란 오명을 들어야 했다. 이런 기간은 1980년대까지 오랫동안 지속돼 지역 문화예술에 대한 시민들의 갈망은 커져만 갔다.
아무래도 인천은 문화시설과 인적자원이 집중한 서울과 아주 가깝다 보니, 서울 문화의 종속적 성향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시민들 중에선 인천을 '서울 문화권'으로 인식할 정도였다. 인천인들은 나름대로 지역 문화를 형성하고 있음에도, 이질적 문화공간 속에서 살아감을 의미하는 얘기다. 그래서 인천은 물론 전국적으로 정부에서 균형 있는 문화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들어 인천문화예술회관 등 각종 문화시설이 등장하면서 척박한 인천의 문화적 토양을 바꿔야 한다는 인식으로 전환됐다. 열악한 문화적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여건이나 자생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어둡기만 했던 인천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는 자각이었다. 이 때부터 차츰 독자적인 인천의 문화 모습을 갖추자는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인천의 문화적 뿌리가 얕다는 인식에 반대라도 하듯, 지역 문화운동을 적극 벌여온 인천인들이 있다. 바로 '내항문학회' 사람들이다. 올해 50주년을 맞는 인천 최장수 문학동인회다. 이 내항문학회가 최근 '내항문학 50주년 기념작품선'을 발간해 관심을 끈다. 내항문학회는 1973년 10월 인천에서 경기시문학 동인회로 출발을 알렸다. 이후 1980년 9월 내항문학회로 명칭을 바꾸고 시·소설·평론 등을 수록한 무크지 형태로 개편해 빠지지 않고 해마다 동인지를 발간해왔다. 아울러 소극장과 코스모스 유람선 등지에서 시낭송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했다. 여기에 문학 아카데미와 청소년 문학상 등 여러 활동으로 인천 굴지의 동인문학회로 자리매김했다. '시와 시적행위'로 시민들에게 시와 연극과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꾀하기도 했다.
현재 내항문학 회원은 20명에 지나지 않지만, 이들은 큰 꿈을 꾸고 있다. 내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인천이란 향토성을 문학에 접목해 각자 분야에서 훌륭한 작품을 내놓으려고 부단히 힘을 쏟는다. 앞으로 50년 이상 더 이어갈 수 있는 동인지로 우뚝 서기 위해 더욱 매진하기를 바란다.
/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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