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서는 대체로 설, 추석 민심을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명절을 맞아 전국 각지 고향을 찾는 아들과 딸들, 동네 젊은이들의 생생한 얘기를 들을 소중한 기회가 됐기 때문이다. 특히 큰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의 명절 민심은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다. 선거 여론의 응집과 확산에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봤다. 실제로 여야 지도부가 서울역이나 용산역을 찾아서 인사를 하거나, 전통시장 등을 찾아서 '보기 좋은 그림'을 만드는 것도 그 효과와는 관계없이 명절 민심을 고려한 것이다.
올해도 여느 때처럼 여야가 추석 민심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의 추석 민심을 듣노라면 그저 각 당에서 하고 싶은 얘기만 전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민심이 아니라 사실상 '당심'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아전인수식 해석은 기본이고 심지어 '선택적 민심'을 통해 민심을 왜곡하기도 한다. 비록 전략적 발언이라 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저변에 흐르는 무서운 민심을 왜곡, 폄하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그러니 추석 민심을 놓고서도 여야가 한목소리를 내기가 어렵다. 또 안 싸우면 그나마 다행이다.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가 3일 국회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추석 민심은 한 마디로 윤석열 정부와 여당은 한심하고, 경제와 민생위기로 국민은 한숨만 나온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반해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3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이번 연휴 기간 국민께서 가장 많이 한 말씀은 역시 경제와 민생을 빨리 회복시켜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추석 민심은 여야 원내대표가 전달한 그대로가 맞을까. 물론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 맞는 얘기도 아니다. 핵심이 빠졌기 때문이다. 실상은 여당보다 민주당이 더 한심하며, 그리고 윤석열 정부에 경제와 민생 회복을 바라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있다는 것인가.
비교적 길었던 엿새간의 연휴, 필자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생생한 바닥 민심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명색이 정치평론을 하는 필자에게 '정치' 얘기를 하는 지인은 한 명도 없었다. 여태 이런 일은 없었다. 어딜 가든 “살기가 정말 힘들어졌다”는 얘기가 제일 많았다. 비단 경제적인 이유만이 아니다. 도덕과 상식의 붕괴 앞에 '사람 사는 세상이 무너졌다'는 한탄의 목소리가 압도했다. 간혹 누군가 정치 얘기를 꺼내도 그뿐, 입술을 꽉 다문 채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밤늦게 낙엽 뒹구는 골목길을 나서며 문득 애창 시 한 구절이 생각났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이육사 '절정') 혹한의 일제 강점기 때 이육사가 마주한 현실이다. 이번 추석 민심도 '서릿발 칼날진' 그 언저리에 있지 않을까 싶다.
/박상병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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