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우리 정치사에서 단식은 정치적 약자가 강자를 향해 날을 세우는 목숨 건 투쟁의 수단이다. 그래서 주로 야권 인사들이, 정치적 승부처가 되는 길목에서 단식투쟁을 벌이곤 했다. 목적과 명분이 뚜렷하고 진정성까지 돋보이면 국민의 큰 응원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사례가 적지 않다. 물론 정치적 목적은커녕 냉소나 조롱거리가 된 사례도 수두룩하다. 그만큼 정치인들의 단식투쟁은 국민 여론에 상당한 인상을 남겼다.

한국 정치사에서 단식의 추억은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빼놓곤 얘기하기 어렵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전두환 군부정권에 의해 정치활동이 봉쇄되자 1983년 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기해 '정치활동 규제 해제' 등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며 무려 23일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당시 단식투쟁 현장을 찾는 재야 민주화 운동가들의 면면이 입소문으로 전해질만큼 정치적 파장이 컸다. 동시에 전두환 군부정권의 민낯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김영삼 전 대통령을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정치인으로 만들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은 지방자치제 도입을 빼고는 얘기하기 어렵다. 1990년 10월8일, 연초의 '3당합당'으로 위기에 처한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는 지방자치제 실시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당시 민주화 흐름이 봇물 터지듯 터지던 시점에 지방자치제 요구는 신선한 이슈였다. 그 결과 비록 반쪽이지만 이듬해 3월 무려 31년 만에 지방의회 선거를 치를 수 있었다. 재기를 모색하던 김대중 총재의 승부수로서는 손색이 없었다.

최근의 대표적인 단식투쟁은 2018년 5월 국회 본청 앞에 천막 텐트를 치고 '드루킹 특검 도입'을 요구한 당시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의 사례가 아닐까 싶다. 민주정치의 근간인 국민 여론을 조작한 문재인 정부를 향한 목숨 건 단식투쟁이었다. 결국 특검이 수용되었으며, 그 결과 김경수 전 경남지사가 감옥으로 가는 등 문재인 정부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안겼다. 이렇다 할 준비도 없이 처절한 심정으로 단식투쟁에 뛰어든 결과 지금도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는 뒷얘기는 들을수록 짠한 마음에 울림이 크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31일부터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단식투쟁 현장엔 “무너지는 민주주의, 다시 세우겠습니다”라는 현수막 글귀가 보인다. 오죽했으면 과반 의석을 가진 제1당 대표가 단식투쟁에 나서겠느냐는 생각도 들지만, 그러나 요구 조건이 너무 막연하다. 누구도 들어 줄 수 없으니 병원에 실려 가는 것 외는 달리 출구도 없다. 그래서 정치적 승부수로는 보이지만 그 진정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수록 단식투쟁은 더 위험하다고 한다. 아무쪼록 몸 상하지 않고 빨리 일상을 되찾길 바라는 마음이다.

▲ 박상병 시사평론가
▲ 박상병 시사평론가

/박상병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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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물밀물] 추석 민심 한 장면 정치권에서는 대체로 설, 추석 민심을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명절을 맞아 전국 각지 고향을 찾는 아들과 딸들, 동네 젊은이들의 생생한 얘기를 들을 소중한 기회가 됐기 때문이다. 특히 큰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의 명절 민심은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다. 선거 여론의 응집과 확산에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봤다. 실제로 여야 지도부가 서울역이나 용산역을 찾아서 인사를 하거나, 전통시장 등을 찾아서 '보기 좋은 그림'을 만드는 것도 그 효과와는 관계없이 명절 민심을 고려한 것이다.올해도 여느 때처럼 여야가 추석 민심을 전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