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만(1917-1963)씨는 일제강점기 1944년 6월10일 경북 상주에서 강제동원 되어 7월12일 일본군 경성사단사령부 군부(인부)로 소속됐다. 그리고 경북에서 같이 징발된 6000여명의 조선인 군부들과 함께 태평양전쟁, 그 지옥의 '오키나와전투'(1945년 4월1일∼6월23일) 최전선에 끌려갔다. 그는 오키나와 게라마제도의 아카도(阿嘉島)에 주재했던 일본군 특설수상근무부대 제103중대에 배속되었고, 1945년 봄엔 자마미도(座間味島)로 이동했다.
그는 방어진지와 방공호구축, 굴파기, 탄약·식량·어뢰정·폭뢰 등의 운반과 설치 작업에 동원됐다. 연합군의 함포사격과 공습으로 포탄과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작업을 강요당해, 많은 조선인 동료들이 옆에서 죽어 나갔다.
장씨는 '가미카제' 자살특공보트인 '신요'를 아카도와 자마미도의 해안가 굴에 숨기거나, 굴에서 꺼내 출동을 지원하는 작업도 하게 됐다. 야간에 굴에서 보트를 꺼내는 특공보트 지원 작업 중에 많은 조선인들이 총탄을 맞고 죽었다.
또한 일본군은 조선인 인부들을 20~25명씩 길이 5m의 작은 땅굴 속에 가두어 놓고 도망가지 못하게 지켰다. 숨도 쉬기 어려운 지하 땅굴 속에서 물도 먹지 못하고 굶어 죽기도 했다. 풀이라도 뜯어 먹으려고 굴을 기어 나왔던 조선인들은 일본군들에게 발각돼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장윤만씨가 있던 오키나와는 일본 측이 '옥쇄(玉碎)'라 미화하는 '자살과 전멸'이 유도된 대표적인 지역으로, 일제의 잔혹성과 인권 유린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일본은 “살아있으면서 미군에게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고 차라리 자결하라”는 식의 철저한 군국주의 교육을 시키며, 원주민과 조선인들에게도 집단자살을 강요했다. “미군이 점령하면 모두 죽일 것”이라는 말을 믿은 많은 오키나와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을 적에게 건네줄 수 없다. 그래서 죽이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다”라고 생각하고 집단자살을 선택했다고 한다. 어머니들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칼과 낫으로 죽이는 비극이 일어났다. 오키나와에서는 9만5000명의 원주민들이 이렇게 집단자살했다. 일본군은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연합군에 항복할 때까지 이 같은 '미친 짓'을 이어갔다. 이미 광란의 일본군들은 이보다 7~8년 전인 1937년 중국 난징에서 30만여명을 학살하고 8만여명을 강간한 경험이 있었다. 난징의 시민과 포로들은 생체실험실로도 보내졌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과 함께 '태평양전쟁실기집'을 감수한 반병률 교수(한국외국어대 사학과)는 “태평양전쟁실기집은 장윤만씨가 상주군 공성면사무소에 집결한 이후 상주-대구-부산-일본항(불명)을 거쳐 군속으로 복무했던 아카도, 자마미도에서 미군에 체포되기까지 전 과정을 두루마리에 몰래 적어와 다시 정리한 희귀한 자료”라며 “특히 일본군이 집단자살을 강요하거나, 한국인 군속들의 투항을 방지하기 위한 감시와 감금, 만행, 학대, 살육 등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음은 '태평양 전쟁 실기집'의 주요 부분이다.
/글·정리 김신호 기자 kimsh58@incheonilbo.com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