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
21 겨울철의 불청객 화마
▲ 1963년 3월 초 남구 관교동 화재 현장. 당시에는 보기 드문 사다리 소방차가 출동해 불길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소방차 벽면에 '원조 마크'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미국에서 기증한 것으로 추측된다.
1884년 소방조 설치 … 1907년 신포동 불로 집 400채 전소

1999년 '인현동 호프집' 사건 어린영혼 57명 불길에 희생

'불'을 가까이 하는 요즘, 전국 각지에서 사상자가 발생하는 화재가 끊이질 않고 있다. 인천은 1884년 '소방조(消防組)'가 설치되는 등 개항장답게 다른 지역보다 일찍 신식 소방기구가 들어섰다.

1907년 인천은 화재로 인해 큰 재앙을 당했다. 3월5일, 지금의 신포동에서 불이나 무려 400채 가량의 집이 잿더미가 되었고 10월19일 각국 거류지의 가옥 19채가 불타는 등 그 한 해 동안 7차례의 큰 화재로 모두 587채가 전소되면서 인천부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1926년 인천의용소방대 및 상비소방대에서 발표한 통계를 보면 지난 5개년 동안 발생한 화재 건수는 376회였다. 원인은 아궁이와 연통 때문에 148, 풍로 10, 궐연(담배) 124, 양등(洋燈) 14, 난로 9, 어린이 장난 16, 내다버린 재 9, 화로 18, 방화 1, 목욕탕 9, 원인 불명 18 등이었다. 분류에서는 빠졌지만 경인선 화차에서 뿜어진 불똥으로 인해 심심치 않게 기찻길 옆 초가집이 불타버렸음을 당시 신문은 보도하기도 했다.

인천에서 현대적인 소방 활동이 펼쳐진 것은 미 군정기인 1947년부터였다. 미국으로부터 기증받은 신식 소방차 15대를 갖춘 인천소방서는 화마에 본격적으로 맞서 싸웠다. 6·25전쟁 후 근 10여 년 동안 큰 화재가 없었던 인천은 1964년 한여름에 예기치 못한 화마로 인해 많은 시민이 희생되었다. 6월 2일 일요일 오전 11시 경 답동 주택가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고 큰 폭발음이 연이어 터졌다. 선박 시동용 화약을 밀조하던 무허가공장 우성화학공업사가 화염에 휩싸였다. 인천소방대는 물론 인천에 주둔한 미군 소방대까지 총출동해 불길을 잡기 위해 사투를 벌였지만 끝내 16명이 사망했고 1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 가운데는 불구경을 하다가 연쇄폭발에 의해 희생된 어린이들이 많았다. 농약을 생산한다며 속이고 공장을 가동해 왔기 때문에 동네 아이들은 단순한 화재인줄 알고 현장에 가깝게 접근해 있다가 변을 당했다.

1968년 인천소방서는 유류 등 화학성 물질로 발생한 불을 끌 수 있는 화학소방차를 도입했고 5층 까지 도달할 수 있는 사다리차 1대를 배치했다. 당시 인천에는 5층 이상 건물이 거의 없었다. 1976년 내무부는 '기다리는 소방에서 움직이는 소방'이라는 모토로 인천을 비롯해 6대 도시에 고층건물이나 산꼭대기에 망루를 설치했다. 아직 전화기가 대중화되기 전 시절이라 화재 신고에 앞서 먼저 육안으로 발견해서 서둘러 출동해보겠다는 취지였다. 인천은 수봉산 정상에 화재감시용 망루를 설치했다.

1970년대 화재 발생의 단골 장소는 시장이었다. 1970년 12월12일 새벽에 동구 중앙시장에서 불이나 6명이 사망했고 20개의 점포를 불태웠다. 중앙시장은 화재취약지구로 지정돼 있어 매년 11월 초부터 아예 소방차 한 대를 입구에 배치해 놓았지만 이불가게, 포목점 등이 밀집돼 있어 불을 조기에 진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77년 2월27일 밤에도 시장 한복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인천소방차 33대를 비롯해 서울소방차와 미8군 소방차 등 44대 소방차가 출동했지만 2명이 숨지고 34개 점포를 태웠다. 중앙시장은 1960년 11월28일에도 불이 난 적이 있었다.

인천화재 중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999년 10월30일 밤에 일어난 '인현동 화재'였다. 이 불로 57명의 어린 영혼이 화마에 희생됐다. 인천 시내 거의 모든 고등학교 소속 학생이 한두 명씩 포함될 정도였다. 1971년 서울 대연각호텔 165명, 74년 청량리 대왕센터 88명 이후 건국 이래 3번째로 많은 희생자를 낸 대형 화재였다. 이 화재 사건은 미국의 CNN 등 주요 언론에서 크게 다루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 시켰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내각 총사퇴를 강력하게 주장할 정도로 이 사건은 '육지의 세월호' 라고 할 만큼 한동안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