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해관 이야기 (상) 조선해관의 태동
   
▲ 1887년경 인천해관이 처음 생겼을 당시 풍경. 왼쪽 상단 건물이 영국영사관이고 그 아래 오른편 건물이 인천해관본관이다. 왼쪽 아래로 감시소가 있고 오른쪽 끝으로 보세창고가 눈에 들어온다. 그 앞으로 짐꾼들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제공=화도진도서관


서양과 맺은 첫 조약 관세자주권 보장

靑 자문받아 창설 … 獨 묄렌도르프 지휘



'조미수호통상조약'과 밀접한 역사는 바로 인천해관의 역사다. 서양과 최초의 조약을 맺으며 조약을 실행할 기구가 해관이었기 때문이다. 본보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 발굴을 계기로 인천해관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세 차례에 나누어 싣는다. 이 기획은 해관사료 수집연구가 김성수씨가 제공한 자료를 재구성한 것이다.


조미수호통상조약(1882. 5. 22 체결)은 세간의 불평등 조약, 굴욕적 조약이라는 평가가 있다. 그렇지만 세관의 입장에선 조선이 처음으로 서양과 체결한 조약이자 '관세자주권'을 보장받은 조약이었다.

해관의 창설은 사실 이 조약의 성과물이기도 했다. 1882년 5월 이후 드디어 조선에도 해관창설에 대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된다. 조선은 그러나 외국에서 수입되는 상품에 대한 지식도, 이를 운영할 인력도, 오고가는 서양인과 소통할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뿐인가. 세금을 수납할 은행도, 근대적 부두 등 항만시설도, 창설에 필요한 자금까지 아무것도 없던 조선이었다. 결국 조선정부는 이 새로운 조직도입을 앞두고 불가피하게 청나라에 자문을 구한다.

청나라 실권자인 리훙장(李鴻章·1823~1901)은 조선이 일본의 세력하에 들어가는 것을 경계해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적극 주선했던 당사자였다. 다음 수순인 해관 설치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리훙장은 조선의 요청이 있기 전부터 미리 준비해 둔 인물이 있었다. 다름아닌 독일인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ollendorff)였다.

리훙장은 묄렌도르프를 조선해관의 수장에 앉히면 여전히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에 입국해 고종을 알현하고는 곧 외부협판(외무부 차관)의 높은 자리를 제수받는다. 이어 총세무사가 되어 조선해관을 창설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당시 해관원 고용을 위해 발송한 공문중 인천해관 초대세무사로 임명된 영국인 스트리플링(Alfred Burt Stripling)의 것은 다음과 같다.

'Authorized by a Royal Decree dated the 24th instant, I have to acquaint you with your appointment as Commissioner of Customs in the Corean Customs Service.' (하략) (이달 24일자 왕명으로 본인(묄렌도르프)은 귀하가 대조선 총해관의 해관세무사(세관장)로 임명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 짧은 글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학자들 사이에 조선해관창설일이 언제인지에 대해 밝히려는 시도가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실록 등 조선정부가 작성한 어떤 문서에도 이 부분을 기록한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던 중 창설날짜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가진 해관문서가 발견돼 이미 2007년에 서울세관에서 영인본으로 발간한 적이 있다. 위 글에서 묄렌도르프는 1883년 4월24일에 고종으로부터 어명(묄렌도르프가 총세무사가 되고, 조선해관을 창설하라는)이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며 구체적인 날짜를 밝히고 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해관에 근무하게 될 대상자들에게 임용문서를 발송하기 전에 이미 청나라에 건너가 해관창설에 소요되는 자금도입 교섭을 했다. 다른 한편 조선해관 근무희망자들을 물색하기도 했다.

우선 청나라 해관에 근무하고 있던 직원들과 개별적으로 접촉해 지원한 희망자 외에도 자신과 인연이 있던 자들을 중심으로 인선해 둔 터였다. 조선으로의 입국은 몇몇 개별적으로 입국한 자들을 제외하고 샹하이에 대기하고 있던 스트리플링의 지휘 하에 모여서 단체로 증기선을 타고 입국한다.

이 날은 6월16일이다. 이들 팀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도착한 해관원이 몇 있었는데 이들은 건축업자를 감독하면서 아무것도 없는 언덕위에서 인천해관 청사와 숙소 등 부속건물을 짓고 개청에 대비하고 있었다.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