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해관 이야기 (중) 조선해관의 태동
   
▲ 1920년대 인천세관과 보세창고 모습. /사진제공=화도진도서관

 

개청당시 직원 모두 외국인

17세 홍우관 조선인 첫 배치

3년 못 채우고 정부직 이동


인천해관은 조선에서 가장 먼저 개청했다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매년 6월16일은 인천본부세관의 개청일로 엄숙한 기념식이 열린다. 인천해관이 가장 먼저 개청한 뒤 부산, 원산해관이 잇따라 문을 열며 조선해관 3관(三關) 설치가 완료된다.

개청 당시 인천해관에 배치된 직원들은 모두 외국인이었다. 세무사 스트립플링(Alfred Burt Stripling, 영국)을 비롯해 영국인 1명, 독일인 3명, 러시아 프랑스, 미국, 청국, 이탈리아인이 각각 1명씩 모두 9명이었다.

조선인으로서 인천해관에 처음 배치된 사람은 홍우관(洪禹觀,1866~1910)이다. 17세의 어린 나이로 1883년 설치된 관립영어학교 동문학에 입학해 1년간 영어를 배운 뒤 제1회 졸업생이 된다.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마친 그는 정부 방침에 따라 동기생 '남궁 억(최우등)', 등과 함께 조선해관에 입사(1884. 10. 4)한다. 당시 보직은 방판(Assistant).

동료 외국인 해관원들의 급료에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그의 월급은 멕시코 달러로 6달러였다. 그러나 국내 물가나 생활수준을 고려하면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이 곳에서 3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정부 인사로 옮겨가고 만다.

이외에도 해관에는 위조 화폐를 감정하고 계수하는 직원(Shroff), 입출항 선박 수속을 위해 출무할 때 노를 젓는 Gigman, 사무실에서 잔심부름을 맡아하는 하인, 시종, 물을 긷던 수부, 목수, 관사를 관리하며 청소나 마당을 쓸고 허드렛일을 하던 정원사, 하인 등도 있었다. 이 외에도 해관 경비와 서울로의 안전한 송금을 위한 호위 병사도 배치됐다.

인천해관은, 징세기관이므로 수출입 화물에 대한 관세 및 톤세의 징수라는 전통적으로 주어진 임무 이외에도 다양한 업무들도 맡았다. 그 임무를 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인천 항만의 설비 수축, 관리, 방파제 건설, 부두 조성 및 유지 관리 ▲제물포 조계지 측량, 부지 경매 주관, 매년 지세(Land Lent)수납 ▲안전 항해를 위한 각종 표지(Leading Mark, 등대, 부이, 비콘 등)설치, 수로 조사 ▲무역 등 각종 통계 생산 및 보고 ▲밀수사범 조사 및 각 영사관 고발 ▲기상 관측, 동 기록 관리 및 보고 ▲검역, 콜레라 병원 운영 ▲왕실자금 관리 ▲정부 차관 도입시 해관세 담보 제공과 정부 차입금 납부, 지급 보증 ▲정부 초청 외국인에 대한 급료 지불 ▲육영공원(관립 영어학교) 운영비 교부 ▲우편사무, 택배(Courier) 사업 ▲선적 등록 및 증서 교부 ▲갯벌 매립 토목공사

당시 해관은 한마디로 종합정부기관이었다. 이쯤 되면 "우리 나라 근대사는 세관사"라는 말이 과언이 아닐 듯 싶다.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