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상 思
지난 2월21일은 단재 선생 서거 74주기 기념일이었다. 이날 단재선생 기념사업회에서 관하고 국가보훈처와 청원군청이 전담하여 하는 연례행사가 열렸다.
먼저 청원군수의 단재선생 약력보고와 단재선생의 친손자 신호식을 주제관으로 제례에 임하고 단재선생 기념사업회 김원웅 회장의 헌사와 김양국 보훈처장과 김주현 독립기념관장의 추모사 및 천주교 불교 기독교 원불교 등 4대 종단대표의 추모제까지 행사를 더욱 엄숙하고 장엄하게 장식하였다.
우선 이 추모행사의 규모와 장엄함에 참여자들을 충정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단재선생은 1880년에 상기 자택에서 출생하시어 13세 때에 친 할아버지에게서 한학을 공부하여 사서삼경을 완독하여 신동으로 불릴 정도였다.
18세 때인 1898년엔 성균관 생도 대표로 항일성토문을 작성, 친일 매국대신 규탄과 1905년에는 신규식, 장지연의 초빙으로 황성신문 논설위원으로 독립의 필치를 날렸으며 이듬해에는 양기탁의 요구로 대한매일의 주필이 되고 1908년에는 을지문덕, 일본의 삼대 흉노, 이순신 전 등을 신문에 연재하여 역사가로도 활동하였다.
이듬해에는 '한일합병론 자에게 고함'의 논설로 기치를 드높였으며 윤제복, 이동휘, 이갑등과 광복회를 조직, 조국독립의 선두자로 헌신했고 1915년엔 망국의 한을 달래며 조국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박은식, 문일평등과 박달학원을 설립, 독립군 양성에 매진하였다.
1919년도엔 3·1운동의 기폭제로 이휘영, 박용만, 신숙 등과 대한독립 선언서를 작성 상해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의 선구자로 추앙을 받았다. 따라서 임시정부의 평정관과 대한 청년단 단장으로 활약했고 만주 독립군 조직인 군사통일 준위를 조직하고 그해 40세에 만혼으로 박자혜 여사와 결혼했다. 1922년 조선혁명 선언으로 의열단을 조직 본격적인 독립 선구자로 자리를 굳힌다.
1927년에는 발기인이 되어 신간회를 조직하였으며 1928년엔 소설 '용과 용의 대결'을 발표하고 임시정부 운용자금이 어려워 중국위폐단과 자금 조성을 위한 접촉을 빈번히 하다가 위폐사건 유가증권 사기 등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에 수감돼 옥고를 치르면서도 일본고관이 와서 친일파가 되겠다는 서명만 하면 석방시켜주고 우대하겠다고 회유하였으나 무섭게 거절하고 1936년2월21일 장열히 순국하였다.
김원웅 단재 기념 사업회 회장은 "최근 우리 일각에선 일제 식민지를 미화하는 해괴한 괴변이 난무하고 우리 역사를 폄훼하며 민족혼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라며 절규했고 김양국 국가보훈처장은 "조국독립을 위해 온몸을 불살르신 단재 선생님을 흠모합니다. 선열들의 이런 삶을 후손에게도 물려주십사"라며 호소했다. 또한 "단재신채호 전집을 완간해서 더욱 기쁘다"라고 희열이 충만했다.
요즘 북·중 관계나 북·미 관계는 미묘하고 매우 어수선하게 돌아가고 있다. 1세기 전 망국시기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필자는 우려하며 촉구한다.
온 국민은 여야 갈등, 남남갈등을 과감하게 척결하고 단재선생 등 구국 선열들의 얼을 이어받아 세계 유일의 부끄러운 분단조국 평화통일을 달성하여 8천만 세계강국 대열에 우뚝 서야 할 것이다.
/박재국 통일부 통일교육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