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월15일 정·부통령 선거
자유당, 관권 동원 부정 선거 획책
이승만, 전국적 퇴진 운동에 하야
대학 설립 적극 후원한 정부 '실각'
재단 이사회 마비…학교 존폐 기로
최승만 학장 거취 놓고 혼란상 지속
5·16 군사정변으로 군부 압력 가중
4·19 혁명 이후 4년간 학장 3번 교체
건실한 육영 재단 영입 갈망 여론 속
조중훈 한진상사 사장 인수로 '활로'
1960년의 4·19혁명은 인하공과대학에 시련으로 다가왔다. 1960년 3월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는 12년에 걸친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 집권 체제를 연장하고 승계권이 부여되는 부통령으로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대규모 부정선거 행위로 점철됐다. 당시 민주당 대통령후보였던 조병옥이 갑자기 사망함에 따라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했다. 하지만 부통령에 대해서는 승산이 없음을 알게 되자 자유당은 관권을 동원한 대대적인 부정 선거 계획을 세웠다. 부정 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진행되다가 4월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하여 전국적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이후 하와이로 망명하게 됐다. 자유당 정권의 종말이었다.
제2공화국의 출범은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설립된 인하공과대학의 버팀목이 하루아침에 와해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재정적 기반이 부실할 수밖에 없었던 인하학원 재단 이사회는 사실상 그 기능이 마비됨에 따라 개교 6년 만에 존폐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 인하학원은 외형상 사학재단이기는 했지만 초창기 이사들은 모두 자유당 정권에 의해 지명된 정부 요인들이었다. 그런 연유로 개인적 출자는 전혀 없었고 재단의 기금 조성에도 간여하지 않았다. 다만 정부 측에서 100만달러를 제공했을 뿐이며 그 외에 창립 당시 기부된 하와이 동포들의 성금 15만달러는 여전히 수령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외부 정치적 상황의 급변에 따라 학내에서도 즉각적으로 혼란이 발생했다. 대학 운영의 최고 책임자인 최승만(崔承萬) 학장이 이승만 대통령의 천거로 취임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심각한 양상을 띠었다. 최 학장은 4·19혁명 초기 자신의 학장 취임과 관련하여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를 표명한 바 있으나 교수회와 총학생회의 사퇴 반대 결의에 따라 학장직을 보전했다. 그러나 곧 인하공대동창회의 사퇴 요구에 직면했다. 또 교수회, 학생회, 동창회, 재단 이사회, 후원회 등이 학장 사퇴와 귀임(歸任) 문제로 상호 대립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최승만 학장 퇴임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학내 갈등은 1961년 5월 학생총회가 동맹 휴교를 단행하는 극단적인 사태로 번졌다. 5·16군사정변이 발생하기 직전의 일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1960년 10월28일 재단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이사진이 총사퇴하면서 새 재단 영입을 위해 교수회, 동창회 및 후원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1961년 2월13일 최승만 학장은 흥한재단 박흥식 사장에게 인하학원의 운영권 일체를 인계한다는 결의안을 이사회에서 전격적으로 통과시켰다. 하지만 법적인 효력을 인정받지 못해 당시의 결의는 무산됐다. 그러던 중 1961년 5월2일 서울지방법원의 판결에 의해 새 인하학원 재단 이사진이 결정되어 확정, 통고됐다. 그 내용의 요지는 '곽상훈(민의원 의장), 이영준(민의원 부의장), 김재곤·김훈·유진(이상 민의원), 김진두(인천시장), 박동길(인하대 교수), 김용택(전 사회부 차관), 정구영·한필(이상 변호사), 최승만(인하공대 학장) 등을 1961년 8월1일까지 인하학원 임시이사로 선임한다'는 것이다. 이어 5월4일 첫 이사회를 개최하고 임시 이사장에 이영준 이사를 선출하여 문교부에 인가 신청을 내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정변이 발생함으로써 인하공대 사태는 또다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5·16군사정권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기존의 임시 이사들 가운데 '구' 정치인으로 분류된 곽상훈, 이영준, 김훈, 유진 등의 민의원과 김진두 인천시장에게 사퇴 압력을 가하였고, 1961년 5월28일의 이사회에서 이를 관철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 김명선(연세대 부총장), 김동일(원자력 위원), 노진설(변호사), 서정익(동일방직 사장), 류승원(인천시장) 등 5인을 새로 선임하기에 이르렀다. 6월21일에는 공석이 된 임시이사장으로 정구영(鄭求瑛) 이사를 선출했다. 재단 실무를 담당할 상임이사직에는 길성운(吉聖運) 전 제주도지사가 맡았다. 또한 새 이사회가 최승만 학장의 퇴임을 요구하였지만 불복함에 따라 4년 7개월을 유지하던 학장직에서 본의 아니게 해임 조치를 당했다. 불행하게도 자율적 방식이 아닌 고압적인 외부 완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마무리되어야 했던 사건들이다.
인하학원 임시이사회는 1961년 9월20일 해군사관학교 교장과 해군대학 총장을 역임한 김장훈(金長勳) 예비역 해군 소장을 인하공대 제3대 학장으로 추천, 임명했다. 김 학장은 오랫동안 끌어온 학내 분규를 수습하고 5·16군사정권의 격변하는 문교 정책에 부수된 여러 가지 난관을 무사히 극복하면서 학원의 질서를 바로잡고 초급 대학을 신설하는 등 인하공대 발전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그러나 김 학장은 1963년 2월1일부로 체신부 장관으로 전임하게 됐다. 이후 인하학원의 제3대 임시이사회 이사장으로서 인하공대와 지속적인 인연을 갖게 되었지만, 인하공대 학장직은 5개월 동안 공석이 되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1963년 7월1일 제4대 인하공대 학장에는 문교부의 승인을 받아 김병희(金昞熙) 교수가 취임했다. 그는 취임 직후부터 대단한 포부와 열의를 가지고 대학 운영과 학생자치활동 등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개혁을 학장 직권으로 단행하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독선적인 학사 행정으로 대학 구성원들로부터 신의를 잃게 돼 1964년 3월23일 학생회 간부들의 주동으로 학생총회를 개최하고 등교와 수업을 거부하는 등 학장 불신임 동맹 휴교를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임시이사회는 김병희 학장 해임 결의를 접수하고 1964년 8월31일 징계위원회에서 김병희 학장의 사표를 수리함으로써 분규 6개월 여에 걸친 학내 소요는 일단 종식됐다.
1964년 9월11일 임시이사회는 서울대학교 교수와 문교부교육기술국장, 원자력연구소 초대 원장을 지낸 박철재(朴哲在) 박사를 제5대 학장으로 선임했다. 개교 10년 동안 빈번한 학내 분규와 비정상적 학장 교체는 인하학원이 당초에 제시했던 이상과는 달리 존폐의 기로에 서는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학장의 역할, 학장과 교수와의 관계, 학생의 자치권과 그 한계 등에 대해 성찰하게 된 계기였다. 그에 따라 미완의 학내 체제를 정비하고 대학 교육을 한층 내실화하며 우수 대학으로의 의지를 굳건히 하는 기회가 됐다.이에 따라 인하공과대학의 정상적인 발전을 기원하는 모든 인하인들은 하루 속히 육영 사업에 뜻을 둔 건실한 재단이 도입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학내 소요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 취임한 박철재 학장은 학내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고 교권의 확립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4년 임기 동안 학내의 질서 정리, 교권 확립, 면학 분위기 조성 등 대학 안정화에 크게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학내 안정 기조가 정착되어 가면서 동시에 건실한 육영재단을 영입하는 일에도 동분서주했다. 이러한 학내 분위기 속에서 발표된 조중훈(趙重勳) 한진상사주식회사 사장의 인하공과대학 인수 의사는 각계의 비상한 관심과 환영을 받게 됐다. 인하공대의 정상적 발전을 염원하는 인하인들의 열망과도 일치했다.
1968년 9월5일 신·구 이사진이 전원 참석한 가운데 인하학원 이양식이 거행됐다. 인하학원 창립 이래 처음으로 재단다운 재단을 맞이하면서 인하공대 제2의 창학을 위한 새로운 도약의 서막을 열게 됐다.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인하대학교 총동창회·인천일보 공동기획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