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재건 과학기술 인재 키운 국책 대학 문 열다

1953년 6월4일 이승만 대통령 담화
같은 해 8월28일 부지 기반 공사 개시

이듬해 2월3일 재단 설립·개교 인가
3월2일 초대 학장 이원철 박사 선임

15일 학부 선발 시험·4월24일 입학식
시설 등 미비 탓 10월5일 개교기념식

1953년 6월4일 피란지 부산 정부청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라디오를 통해 <인하대학의 설립에 관하여>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50여 일 후인 7월27일 6·25전쟁은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후 정부는 파괴된 산업 시설을 빠르게 재건해야만 했고, 원조를 얻기 위한 외국과의 소통이 절실했다. 정부는 공업과 산업 기술 개발에 필요한 외국어 전문가의 양성이 시급했다. 이 대통령은 7월31일 '외국어대학' 설립을 촉진하는 유시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 1953년 8월28일 인하공과대학 기공식장. /사진제공=인하대학교박물관
▲ 1953년 8월28일 인하공과대학 기공식장. /사진제공=인하대학교박물관

1953년 8월28일 인하공과대학 설립을 위한 기공식이 거행됐다. 미추홀구 용현동과 학익동에 걸쳐 있던 대학 부지는 이 대통령이 몇몇 후보지를 직접 방문 답사하면서 최종 확정한 곳이다. 명목상으로는 1954년 2월1일 대학 부지를 기증하는 것으로 계획됐지만, 이미 내부적으로는 확정된 사안이었기 때문에 육군 공병대가 교사 건축을 위한 기반 공사에 들어간 상태였다.

인하공과대학설립기성위원회는 본관과 종합교사를 개교 전에 건축하고 기계공학관, 조선공학관, 광산공학관과 부속 공장은 최대한 앞당겨 개교 직후에 완공토록 계획하고 있었다. 이들 학과는 당시 산업 현장에서 가장 절실했던 분야였다. 임시 교사로 사용하기 위해 착공한 건물은 기계공학관과 부속 공장, A동(연와조 단층 100평)과 B동(목조 단층 200평)으로 기공 3개월 만인 11월 28일 완공됐다. 기공식과 준공식에 이 대통령을 비롯한 정·관계 인사와 지역 유지, 인천시민들이 참여했다.

1954년 2월3일 인하공과대학설립기성위원회가 문교부에 제출한 <설립취지서>는 재단법인은 '인하학원', 명칭은 '인하공과대학'으로 한다는 것으로, 그 취지는 기존 인하대학 설립에 관한 담화문의 내용과 동일했다. 이어 2월5일 재단법인 인하학원의 설립과 개교가 인가됨에 따라 경과보고 및 제반 서류는 위원장인 김법린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이기붕 인하학원 이사장에게 인계되고 설립기성위원회는 자동 해산됐다. 인하공대의 설립이 인가되자 문교부에서는 신문과 방송을 통해 그 의미를 국민에게 알리는 담화를 발표했다.

1954년 2월8일 김법린 문교부 장관은 <인하공과대학 설립 절차를 마치고>라는 담화에서, 인하공과대학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와 거족적인 노력, 하와이 동포의 민족운동 50주년 기념, 2억5000만환의 재단 구성, 1954년 4월1일 개교, 기계공학과·조선공학과·광산공학과·금속공학과·화학공학과·전기공학과의 6개 학과 180명 선발, 인천시 용현동의 교사 신축 등의 사실을 열거하며 우리 교육 역사상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사라고 평가했다. 인하공과대학의 설립은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설립자로서의 각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인하대학의 설립 과정에는 설립 종잣돈이 된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부지 매각 대금 외에 정부의 국고보조금 6000만환과 국내의 민간 기부금 2774만3249환 등 총 9674만여 환이 기금으로 조성됐다. 그러나 이 기금은 처음에 예산으로 잡은 515만500불(3억903만환)의 30%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당초 기대했던 외국 기관의 원조금(330만불)이 전무했을 뿐 아니라, 전쟁 직후라 국내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민간 기부금이 당초의 목표액에 크게 못 미쳤던 때문이었다. 민간 기부금의 주요 내역은 대한중석광업공사 2000만환, 박흥식 200만환, 대한금융단 200만환, 대한수리조합연합회 72만환, 김성곤 60만환, 이한원·김용성 50만환, 대한항공 40만환, 동양방직회사 20만환 등이었다.

▲ 1954년 10월5일 인하공과대학 개교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원철 학장에게 교기를 수여하고 있다. /사진제공=인하대학교박물관
▲ 1954년 10월5일 인하공과대학 개교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원철 학장에게 교기를 수여하고 있다. /사진제공=인하대학교박물관

1954년 3월2일 인하학원 재단 이사회는 초대 학장으로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중앙관상대 대장을 역임한 이원철 박사를 임명했으며, 부학장으로는 설립기성회 간사 일을 보았던 박홍근을 선임했다. 3월15일에는 6개 학부(기계, 금속, 조선, 광산, 전기, 화학) 180명에 대한 선발 시험이 치러졌다. 시험은 서울 돈암동의 경동고등학교를 빌려 실시됐다. 이때는 인하공과대학 교사가 일부 완공된 시기였으나 학사를 주관하고 있던 서울 연락사무소와의 업무 편의라는 측면과 지원자 수가 미지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총 응시자는 367명으로 이 중 180명을 합격자로 선발했다. 3월27일 합격자를 발표하고, 4월24일 토요일 역사적인 제1회 인하공과대학 '신입생 입학식'이 거행됐다. 이날 '4월24일'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하대학교의 개교기념일이다. 낙후된 한국의 공업과 산업 발전을 위한 첫 발걸음이었다.

▲ 인하공대 개교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치사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인하대학교박물관
▲ 인하공대 개교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치사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인하대학교박물관

거국적인 준비와 지원에 따라 설립된 인하공대는 입학식 당시 시설이나 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다. 그래서 개교기념식은 6월로 연기됐다가 다시 10월5일에 이르러서야 거행하게 됐다. 정문에 세워진 개교기념식 환영 경축문에는 기공식 때와 마찬가지로 좌우에 '대한민국 만세'와 '이대통령 각하 만세'가 쓰여 있었다. 기념식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함태영 부통령을 비롯한 정부 요인, 이기붕 이사장 등 각계각층의 저명인사, 인천 지역의 유지와 학부형, 하와이 교민회 대표 등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 신입생들이 양복과 넥타이에 중절모를 쓰고 첫 개교기념식장에 참석했다. /출처=KTV
▲ 신입생들이 양복과 넥타이에 중절모를 쓰고 첫 개교기념식장에 참석했다. /출처=KTV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치사를 하고 이원철 학장에게 교기를 수여했다. 이 대통령은 “인하공과대학을 세계적인 공과대학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학생들은 우수한 기술을 습득하여 나라에 이바지 하라(대한뉴스 제 46호)”고 당부했다. 또 엘리스 O. 브릭스 주한미국대사를 비롯한 이기붕 인하학원 이사장과 이선근 문교부장관의 축사가 있었다. 이어 교가를 합창한 뒤 변영태 국무총리 겸 외무부 장관의 인도로 만세 삼창을 외친 후 기념식을 마쳤다. 인하공대의 개교기념식은 방송으로 중계되었는데 개교한 지 6개월 뒤 정부 요인이 모두 참석한 국가적인 행사였다.

▲ 첫 개교기념식에 참가한 내빈들의 차량과 초창기 교사(校舍). /사진제공=인하대학교박물관
▲ 첫 개교기념식에 참가한 내빈들의 차량과 초창기 교사(校舍). /사진제공=인하대학교박물관

인하공대의 출범은 자유당 정권하에서 이승만 대통령 개인을 기념하고 국가 정책에 부합하는 학교를 설립한 것이기 때문에 국립과 사립의 구분을 넘어서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오히려 사립으로 하였기 때문에 당시 설립된 국공립대학과는 달리 별도의 파격적인 지원과 국가 정책을 즉각적으로 적용할 수 있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과학기술의 습득을 위해 미국 유학을 장려했으며, 1954년에도 100여명을 선발하여 기계학 기술을 전공하도록 미국으로 보냈다. 이때의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를 보면, “지금은 기계시대요 우리나라를 잘 건설해서 세계에 자랑할 만한 나라를 만들려면 기계학과 과학 배운 사람이 많이 생겨서 배운 것을 공헌해야만 할 것이요 기계학을 배운 사람들은 우선 인하공과대학에서 교수도 되고 연구도 맡기게 할 것이니 부지런히 연구 공부해서 시급히 돌아와 공헌하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라 하여, 과학기술을 연구하고 귀국하는 인재에게 인하공대 교수직을 제의하기도 했다.

▲ 인하공대 초창기 ‘서울 관 780’ 차량번호를 단 교직원 통근버스. 사진제공=인하대학교박물관

그러나 전쟁 상처에 대한 복구가 시급한 현실이었고 고급 과학기술자보다는 현장에서 활용할 기술 인력이 더 절실했던 시절이다. 1955년 4월15일 이승만 대통령은 '직업보도학교를 확대하여 기계학과 기술을 발전케 하라'고 문교부에 지시하여 생산 교육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우선 긴급한 전화, 전선, 수도, 철공, 목공 등의 기술자 양성을 위한 '직업보도학교'가 인하공과대학에 설치됐다. 이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이 교육제도를 상설화하기 위해 1958년 OECD의 원조자금으로 인하공대에 중앙종합직업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1958년 1월 국가 정책에 따라 인하공대에 병기공학과와 응용물리학과(원자력공학 전공)가 증설됐다.

▲ 1954년 4월24일 인하공대 개교를 앞두고 4월5일 식목일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이 하사한 느티나무를 교정에 심었다. 이 나무는 1958년 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설립된 중앙종합직업학교에 뿌리를 둔 인하공업전문대학 캠퍼스 내에 있다. /사진제공=인하공업전문대학
▲ 1954년 4월24일 인하공대 개교를 앞두고 4월5일 식목일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이 하사한 느티나무를 교정에 심었다. 이 나무는 1958년 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설립된 중앙종합직업학교에 뿌리를 둔 인하공업전문대학 캠퍼스 내에 있다. /사진제공=인하공업전문대학

정부는 인하공대 운영을 위한 여러 가지 재정적 혜택도 제공했다. 한국은행 총재를 재정담당이사로 선임하고, 은행융자와 시멘트 총판매권을 활용하여 학교 운영비를 마련할 수 있는 특혜를 주기도 하였으며 외국 원조 자금을 지원했다. 이처럼 인하공대는 국책 대학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인하공대를 국공립으로 할 경우 그 기념적 의미가 사라질 뿐 아니라 각종 지원 및 국책 실천에 오히려 장애가 될 가능성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하공대는 사립대학이면서도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기관의 간섭과 보호를 받는 한편 국책적 기능을 수행하는 특수한 위상이었다.

▲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인하대학교 총동창회·인천일보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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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학교 개교 70년…인천과 하와이, 그리고 인하대학교] 하와이의 이승만 38세 장년의 이승만이 일제강점기 해외로 망명해 정착한 곳은 하와이였다. 그가 호놀룰루에 도착한 1913년 2월3일부터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32년간 하와이는 그의 활동의 주 근거지가 됐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교육, 종교, 외교적인 차원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했는데 한인기독학원, 한인기독교회, 대한인교민단·대한인동지회는 바로 그 기반이 된 조직이다.이승만(1875~1965)은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에서 아버지 이경선과 서당 훈장의 외동딸인 어머니 김해 김씨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양녕 [인하대학교 개교 70년…인천과 하와이, 그리고 인하대학교] 이승만의 민족교육 구현과 교육 이념 국책 대학으로서 1954년 개교한 인하공대 설립을 주도했던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晚, 1875~1965)은 정치가 이전에 교육자였다. 그는 1905년 9월~1910년 7월에 걸쳐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의 학사 학위와 하버드대학의 석사 학위, 프린스턴대학의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승만의 삶과 꿈>의 저자 유영익은 “이승만은 국제법을 전공한 국제정치학자였고 만국공법의 대가였다. 일본과 중국에서 우리보다 많은 유학생을 구미에 파견했지만 그들 중 이 박사의 학력에 필적할 만한 인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적시하고 있다. 이렇게 그 자신의 [인하대학교 개교 70년…인천과 하와이, 그리고 인하대학교] 자유당 정권의 몰락과 인하공과대학의 시련 1960년의 4·19혁명은 인하공과대학에 시련으로 다가왔다. 1960년 3월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는 12년에 걸친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 집권 체제를 연장하고 승계권이 부여되는 부통령으로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대규모 부정선거 행위로 점철됐다. 당시 민주당 대통령후보였던 조병옥이 갑자기 사망함에 따라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했다. 하지만 부통령에 대해서는 승산이 없음을 알게 되자 자유당은 관권을 동원한 대대적인 부정 선거 계획을 세웠다. 부정 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진행되다가 4월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