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도시 전체에 풍성한 근대역사를 품은 인천은 다양한 나들이 장소를 제공한다. 그 중 중구 송월동 동화마을은 관광객에게 퍽 인기를 끄는 곳이다. 차이나타운 바로 옆에 있어 늘 붐빈다. 아이들과 함께 상상의 나래를 펴기에 그만이다. 세계 명작동화를 주제로 마을 여기저기에 색을 입히고 조형물을 설치하면서 인천의 주요 관광지로 떠올랐다.

인천항 개항(1883년) 이래 송월동은 '부촌'으로 여겨졌다. 개항 이후 물밀처럼 쏟아져 들어온 서양문물과 더불어 각국인이 이 일대에 터전을 삼아서다. 일본인은 중앙동과 선린동을 중심으로, 미국·독일·프랑스·영국 등지의 외국인은 지금의 자유공원을 품은 응봉산 인근 송월동과 송학동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이처럼 번성을 누렸던 송월동은 1970년대를 지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젊은이들이 인천의 다른 곳과 서울 등지로 떠난 탓이다. 그래서 중구청은 2013년부터 송월동에 새 활력을 불어넣고자 주거환경개선 사업을 벌여 동화마을로 조성했다. 마을 골목을 따라 어릴 적 책에서 읽던 동화들을 입체적으로 만나게 된다. 마을 건물 외벽엔 겨울왕국·신데렐라·피노키오 등 11편의 동화 속 주인공이 그려져 있다. 주로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관광객은 벽화와 조형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그런데 개항 이후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는 송월동 동화마을 원주민들이 뜻밖의 불편을 호소한다. 벽화가 생긴 후 계속 드나드는 차량과 관광객들로 소란스러워서라고 한다. 사생활 침해는 물론 주차도 어려운 등 살아가는 데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심지어 벽화를 다 지워버려 동네를 원래대로 만들길 원하는 주민도 있을 정도다.

주민 불편은 중구 조사에서도 드러난다. 최근 '동화마을 활성화 방안 용역 결과 보고서'에선 주민 중 상당수가 거주 환경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주민 20명을 대상으로 한 심층 면접에서 현 주거 상황에 '불만족한다'고 응답한 주민이 10명(50%)이었고, '보통'은 7명, '만족'은 3명에 불과했다. 동네를 떠나는 주민도 잇따른다. 2020년 14채였던 동화마을 내 빈집 수는 2년 만에 18채 더 늘어 32채에 이른다. 결국 동네 유명세가 되레 주민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는 셈이다.

송월동은 동화마을 개장 전엔 한적했다. 나이 지긋한 주민들은 요란한 관광지보다는 조용하게 살기를 바란다. 중구는 이런 점을 감안해 주민 불편 해소를 위해 만전을 기해야 마땅하다. 아울러 동네 상권화로 생기는 경제적 이익을 원주민에게 환원하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처럼 인천의 '명물'로 떠오른 동화마을이 '보존의 길'로 갔으면 싶다.

▲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



관련기사
[썰물밀물] '인천 희망의 숲' 조성에 차질 없어야 우리나라에서 황사는 이제 연례행사다. 주로 몽골과 중국에서 흙먼지가 날아들면서 일어난다. 바람에 따라 하늘을 덮었다가 서서히 떨어지는 모래흙이다. 몽골의 고비와 중국의 타클라마칸 사막 등지에서 발원한 황사는 이웃국가에 큰 피해를 준다. 조용히 인명과 재산 등 생활환경에 악영향을 끼치는 '재난'이다. 봄철에 주로 일어나는 황사는 국내에선 3월부터 5월까지 자주 관측된다.역사적으로 황사 얘기는 삼국사기에 나올 정도다. 신라 174년 음력 1월 우토(雨土)를 표현했고, 백제에선 379년 음력 4월 흙이 비처럼 하루 종일 내 [썰물밀물] 버려진 영종 삼목토성을 살려라 조선시대에 자연(영종도의 옛 이름)·용유·삼목도 등은 나라의 말을 키우는 곳으로 유명했다. 자연도와 삼목도엔 세종 3년에 목장이 설치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엔 자연도와 삼목도가 국마 사육장으로서 매우 중요했다고 기록한다. 영종도와 용유도를 합친 영종진은 오늘날 물치도와 월미도를 행정구역으로 삼고, 인천을 비롯해 부평과 안산 등의 수군 업무까지도 관할할 정도로 컸다고 한다.삼목도는 바로 옆 영종도와 연륙도로로 연결된 섬이었다. 그러다가 인천국제공항 건설을 위해 영종·용유·삼목·신불도 사이에 갯벌을 매립하면서 활주로가 들어섰다. 드나드는 [썰물밀물] '누들플랫폼'의 변화를 바라며 일반적으로 '국수'로 알려진 면 음식은 국가별로 여러 형태로 개발돼 왔다. 세계 많은 문화권에서 인기를 끄는 국수의 기원은 정확하지 않지만, 기원전 4000년쯤 중국에서 만들었다는 얘기가 통설이다. 밀이나 쌀로 만든 반죽을 가느다랗게 뽑은 후 말려서 내놓는다. 국수는 한국·일본·베트남·태국 등 아시아 지역에 퍼진 후 유럽으로 넘어가 이탈리안 파스타를 낳을 만큼 세력을 넓혔다고 한다.우리나라에선 주로 밀·쌀·메밀 등을 써서 면을 만든다. (칼)국수와 냉면이 대표적이다. 이들 재료 외에 고구마나 칡 등을 이용해 면을 뽑기 [썰물밀물] 인천의 역사적 역할 인천은 한국 기독교 출발지다. 각국 선교사들이 국내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종교계에선 선교사가 처음으로 제물포항에 도착한 1885년 4월5일 부활절을 국내 첫 기독교 전파 시기로 본다. 이들 선교사는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다. 아펜젤러는 136년 전인 1887년 인천에 국내 최초 감리교 내리교회를 세웠다. 작은 초가집에서 예배를 시작했는데, 성도가 점차 늘어나면서 교세를 확장했다. 인천지역에 특히 감리교회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이런 역사를 기려 인천 앞바다 해안도로 바로 옆 항동엔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썰물밀물] 상전벽해가 실감 나는 서구 어릴 적 지금의 인천 서구 지역은 '개건너'로 불렸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어귀를 건너가야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동구 송림동과의 사이에 놓인 나루터에서 거룻배를 타고 가야 했다. 1961년 인천교를 준공하면서 나루터는 없어졌지만, 한동안 인천인들에게 개건너란 이름은 계속됐다. '정겨운 명칭'을 잇고 싶은 집단의식의 표출로 보인다.중고등학교 시절 개건너는 소풍 단골 장소이기도 했다. 그 때만 해도 서구는 전답과 농장 등을 아우르는 전형적 농촌마을이었다. 시내를 벗어나 모처럼 시골 내음을 맡으며 즐거워했던 [썰물밀물] 인천대 국립화 10주년을 맞아 인천대학교의 역사는 파란만장하다. 지역사회에 파행과 분규로 점철되던 '선인학원' 산하에서 신음하다가 탈바꿈을 시도했다. 1994년 3월1일 선인학원 내 14개 학교가 한꺼번에 시립대학과 공립 중·고교로 변한 일은 국내 교육사에 길이 남을 하나의 '사건'으로 치부된다. 선인학원 시립화엔 희생을 감수하며 벌인 학생·교사·교수·교직원들의 용기와 고장의 명예와 자존심을 곧추세우려던 시민들의 의지가 한몫 단단히 했다.앞서 1993년 6월엔 백인엽 선인학원 설립자가 기증을 다짐하는 증서를 인천시에 넘겼다. 그는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