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선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 일자리전략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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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윤선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 일자리전략센터장

강남역 살인사건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와 강도 살인사건. 최근 우리나라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뉴스가 줄을 잇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각종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는 뛰어난 여성이나 여성의 높은 합격률에 대한 뉴스를 자주 접하게 됐다. 우리사회는 학력을 중시한다.

그런데 학교에서 여학생들의 성취는 남학생들을 앞지르기 시작했고, 대학입시에서 내신과 각종 활동이 중요한 수시 비중이 높아지면서 남자아이를 둔 학부모들은 내신을 잘 받는 여학생들과 함께 경쟁해야 하는 남녀공학을 회피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여성의 성취는 시험과 같은 예측 가능한 규칙이 적용되는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학교를 벗어나거나 시험이 아닌 다양한 규칙이 작동하는 순간 상황은 바뀌기 시작한다. 여성들은 학교를 벗어나 사회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이제까지 남성과 여성에게 동일한 규칙이 적용된다고 믿고 있었던 또는 의심하지 않았던 상황을 마주하며 혼란을 겪는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특정 상황이나 몇몇 여성들의 화려한 성공이 마치 모든 여성들의 성공인듯 확대 해석되고, 극히 일부겠지만 남성들 중에는 여성들로 인해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왜곡된 인식을 하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이 모든 것은 검증되지 않은 채 사람들이 그냥 믿게 돼버린 신화 같은 얘기다. 사회적 성공을 이룬 여성들의 등장은 사실상 특정 분야와 일부 여성들이 이룬 성취일 뿐이다. 우리는 여성의 높은 교육 수준에 비해 고용률 격차는 쉽게 개선되지 않고 있으며, 남성에 비해 현격히 낮은 임금수준과 불완전 고용비율이 높다.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여성의 대표성은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다. 성별 격차와 관련한 OECD 발표가 있을 때마다 부끄러운 우리나라의 성평등 수준이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도는 마치 연례행사와도 같다. 그나마 최근에는 통계 집계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등 남성들의 적극적인 반격도 빈번해지고 있다.

여전히 우리사회는 뿌리깊은 가부장적 문화가 가정과 사회조직 곳곳에서 작동되고 있고, 그 안에서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상처를 입고 있다. 그런데 조금 비약해보자면 이러한 가부장적 문화는 상대적인 권력 서열화 방식으로 작동되고, 그 과정에서 불합리하고 천박한 방식의 갑질로 재생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그간 우리사회를 지배해온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경쟁을 사회 발전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그에 따라 모든 성공과 실패의 원인 역시 개인 수준의 문제로 치환해버리고, 그 과정에서 실패한 개인은 무력하고 상처를 입게 된다. 그 사이 우리는 함께 치유해나가야 할 많은 문제를 외면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화풀이 대상을 잘못 정조준하기 일쑤다. 우리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서 또는 을인 동시에 누구에게는 갑질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최근 강남역·구의역사건을 겪으면서 추모가 일상이 되고 있다는 자조 섞인 슬픈 얘기나 나오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현상이 어쩌면 그간 우리가 다 알면서도 외면해왔던 부당함에 대한 개인의 공감이 드디어 사회적 성찰로 나아가는 길목에 와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존 듀이는 민주사회를 위한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반성적 사고'가 가능한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반성적 사고란 나의 말과 행동이 타인과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를 미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반성적 사고를 위해서는 현상학적 상상력과 공감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나의 말과 나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떠한 감정과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러한 상상의 과정을 통해 타인의 입장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상학적 상상력과 공감을 한다고 해도 그 상황에 처한 당사자가 아니라면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적 사고를 통해 서로에 대한 보다 진지한 이해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해 반성적 사고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반드시 그에 걸맞은 행동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반성적 사고를 하는 현명한 개인이라도 그 개인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현명한 개인들과의 연대, 그리고 변화에 대한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함께 공감하고 공분하는 강남역사건이나 구의역사건이 현명한 개인들의 용기와 연대를 이루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순간 타인과 세상에 대한 나의 편견과 천박함이 드러나는 언어와 시선으로 내 아이들과 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낀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반성적 사고와 성찰, 그리고도 드러나는 나의 한계에 대한 인정과 반성을 무한 반복해 나가는 일, 그리고 내 아이가 나의 편견과 한계를 지적해 줄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최윤선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 일자리전략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