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에서 인천지역이 차지하는 문화와 그 변천상을 체계적으로 서술한다는 것은 곤란한 문제이다. 문헌기록이 적을 뿐 아니라, 관련 유적^유물의 조사 또한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다만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거하여 인천지역이 초기백제를 형성한 비류(沸流)의 근거지라는 점이 중시되어 왔다. 실제 관련 전승과 고고학적 조사 내용도 백제시대의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백제 관련 전승과 유적, 유물을 중심으로 인천의 고대문화의 한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문학산성:해발 224m 문학산 정상부에 남아있는 석축의 산성이다. 비류의 도읍지로 전하는 곳이다. 지금도 339m 정도 성벽이 남아 있다. 97년 지표조사 결과 처음에는 토성이던 것이 삼국말 혹은 통일신라를 거치면서 석성으로 개축되었고, 이것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라 한다. 성내 시설로는 토축의 내성과, 봉수대, 안관당 및 2곳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이중 봉수대는 그것이 산 정상에 볼록하게 올라온 것 때문에 미추왕릉(비류왕릉)이라 하였고, 우물 또한 비류정으로 불렸다고 전한다. 안관당에서는 임진왜란때 인천부사를 지낸 김민선의 제사를 지냈다. 본래는 인천 관아와 지역민을 수호하는 문학산의 산신(山神)을 모시던 곳이다. 그러나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산성의 축조연대를 논하기는 자료가 불충분하다.

 미추왕릉:미추왕릉의 위치와 관련한 전승은 18세기 후반이래 문학산설과 연수구 동춘동설로 나뉘어 있었다. 그 중 문학산설의 경우 산 정상의 토단 곧 봉수대가 미추왕릉이라는 견해와, 관교동으로 내려오는 북쪽 사면 돌출부의 한 고분이라는 두 전승으로 나뉜다. 현재 미추왕릉의 위치에 대한 전승은 그 타당성 여부를 명확히 하기 어렵다. 다만 그것이 문학산 일대에서 매우 오랜 연원을 지니고 전해진 것은 분명하다. 문헌 기록으로 나타나는 18세기 중엽에 생성되었다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백제우물:연수동과 청학동 접경지역에 위치한 머그미에 속칭 `백제우물"이란 것이 있다. 93년 도로 개설로 소실 위기에 놓인 것을 `미추문화연구회"의 노력으로 현상은 유지되었으나 사실상 방치되어 있다. 93년의 조사때 청자와 백자편이 다수 확인되어 연대가 오랜 우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물 이름에 `백제"가 붙은 것은 아무래도 근래의 일인 듯하다. 우물이 깊어 `백자(百尺) 우물"이라 불려온 전승을 통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능허대:인천시 남구 옥련동 해안쪽 선단에는 백제의 사신들이 해로로 중국을 가기 위해 출발하였던 곳이라는 능허대가 전해진다. 90년 시 기념물 8호로 지정된 인천의 대표적인 백제시대 전승유적이다. 능허대는 해변 백사장에 마치 섬과 같이 솟은 곳에 정자가 있어 전망대 같은 구실을 한 곳이고, 중국으로 향하던 선박의 출발지는 능허대 주변 포구인 한나루(大津 혹은 漢津)터였다. 인천 해수욕장으로 저명한 송도(松島)가 바로 능허대를 가리킨다. 한나루는 구 수인선 송도역부근 시장 주변에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편찬된 인천부읍지에 한나루를 능허대에 부속하여 서술해 혼동을 주고 있다. 그러나 능허대가 한나루를 포괄하는 지명으로 전승된 측면도 있다.

 관교동 토성지:관교동 북쪽 일명 승학산을 둘러싸고 있었다는 토성이다. 49년 이경성의 `인천의 명소고적"에 처음 기록된 이래 현재 일부 백제사 연구자들은 비류백제의 성곽으로 보기도 한다. 토성 흔적이 남아 있었다는 마근대미는 승학산의 북쪽 구릉일대로 전해진다. 현재 마근대미라는 지명을 남기고 있는 것은 `마근대밋고개"뿐이다. 고문헌에 마근현(馬根峴 혹은 麻根峴)이라 표기되어 있다. 문헌의 마근현은 신미양요때 미국 함선의 출몰에 따라 인천 관아로 통하는 고개와 같은 요로에 방수군을 배치한 곳으로 나타난다. 당시 인천 연안에 대한 방비 상황을 그 `화도진도"에도 적이 상륙하기 쉬운 나루나, 성으로 통하는 골짜기 주변에 토둔(土屯)이라 표기한 소규모의 토루를 설치한 것을 군데군데 볼 수 있다. 마근대미 고개에 있었다는 토성도 이와 같은 `토둔"의 하나가 아닐까 여겨진다. 물론 조선시대 이전에도 마근대미 고개 주변이 인천 관아 주변을 방어하는 요충지였을 것이고 이는 백제시대에도 그랬을 것이란 추정은 가능하다. 문제는 이 유적의 흔적을 전혀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문학산을 중심으로 인천지역에서 학술조사를 통해 확인된 백제시대 유적으로는 백제토기 산포지 7개 지역이 있다.

 선학동 무주말 백제토기산포지:문학산의 가장 동편에 치우쳐 솟아 있는 봉우리의 동사면에 임야를 개간하여 조성한 경작지에서 확인된 유물산포지이다. 현재 유물산포지 주변은 임야가 형성되어 있으며, 단지 북편으로 희영아파트가 건립되면서 일부분이 삭평된 상태이다. 이곳에서는 백제 유물로 추정되는 격자문이 중복타날된 대옹편과 조선시대 도^자기편들이 수습되었다. 이로 보아 생활유적이나 분묘유적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백제시대 대옹편의 출토는 문학동의 백제토기산포지 확인과 함께 문학산 동록 일대가 백제시대 생활권이 형성된 지역임을 짐작케 한다.

 문학동 백제토기산포지:문학동 종합경기장건설현장 남쪽의 해발 61.8m 구릉의 동사면에서 확인된 유물산포지이다. 99년 지표조사에서 백제 토기 6편을, 뒤이은 발굴조사에서 다시 6편을 수습하면서 알려진 유적이다. 문학산 일대가 백제시대까지 올라가는 지역임을 확인시켜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유물산포지 남쪽으로 제2경인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북쪽은 문학경기장 건설로 잘린 상태이다. 백제토기편은 이 삭평된 절개면과 인접한 지점에서 수습되었기 때문에 종합경기장 건설이전 북망산쪽으로 뻗어 있던 북사면과 동사면에 걸쳐 유적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운서동 유물산포지:영종도 백운산 남쪽 운서초교에서 서남부에 펼쳐진 약 10만평의 구릉대지 여러 곳에서 백제토기 산포지가 확인되었다. 최근 실시한 시굴조사에서도 여러 점의 백제토기가 수습되었다. 운서동 유적은 백운산 남쪽의 아늑한 구릉대지 위에 가까이 바다를 접하여 좋은 생활환경을 이루고 있다. 특히 토기가 넓은 지역에서 밀집도가 높게 출토되는 것으로 볼 때, 비교적 규모가 큰 백제시대 생활유적이 자리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앞으로 조사가 더 진행된다면 인천지역 백제문화를 복원하는데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운남동 남뒤마을 유물산포지:운남동 백제토기산포지는 백운산에서 남동쪽으로 뻗어내린 산록의 끝자락에 형성된 구릉에 있다. 유물은 주로 경작지에서 수습되었으며, 대지와 접해 있는 소로의 단면에서도 유물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유물의 밀집도는 매우 높은 편이며, 경질무문토기편뿐만 아니라 격자문과 사격자문, 유사승석문 등이 타날된 연질^경질토기편과 각종 파수부편들이 다량 확인되고 있다. 운서동 백제토기산포지와 함께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중산동 유물산포지:월미도에서 영종도로 들어가는 구읍나루가 자리한 중산동 영종진 주변에서 확인된 백제토기 및 와편 산포지이다. 유물은 토성벽과 기저부 주변에서 흘러내린 흙더미에서 수습되었다. 특히 삼국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와편이 확인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구영종진 토성이 백제시대까지 올라갈 가능성을 제시하는 한편 백제의 해양방어시설의 면모까지도 추측케하는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인천지역에서 문헌과 전문을 통하여 알려진 백제관련 유적은 삼국시대까지 그 연대를 올려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비류의 무덤으로 전하는 미추왕릉과 미추홀의 중심지로 근래 자주 이야기되고 있는 관교동 토성지의 경우 현재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백제우물터, 능허대지, 문학산성의 경우도 고고학적 조사가 부족하여 연대를 확정할 만한 자료가 부족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전승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이래 인천이 비류의 근거지 미추홀로 인식되고 있고, 백제관련 전승이 모두 인천의 오랜 읍지인 문학산 일대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문학산 일대는 선사이래 인천 고대문화의 중심지였다고 여겨진다. 특히 백제시대 유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문학산성에 대한 보호와 관련 고고학적 조사를 기대해 본다.

 문학산을 비롯한 인천지역에서 고고학적 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백제유적은 8곳이다. 선학동과 문학동 등 문학산 주변에서 2곳, 문학산 서쪽끝 해안에서 건너다 보이는 영종도에서 6곳의 백제토기 산포지가 확인된다. 모두 지표조사로 확인된 곳이어서 유구의 성격은 명확치 않다. 다만 주변 환경과 지형으로 볼 때 대부분 생활유적으로 보이고, 중산동 구 영종진 유적은 연안방어시설일 가능성이 있다. 수습된 백제토기편은 40여점이고 일부 와편도 확인된다. 연대는 기원 2~5세기에 걸쳐 있는데 발굴조사를 거쳐야 분명해질 것이다. 이들 유적은 인천지역 백제문화의 성격만이 아니라 인천지역사 연구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문학산 일대의 백제관련 전승이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천공항 개항에 따른 각종 개발로 유적 파괴가 우려되는 영종도 일원에 대한 적극적인 조사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