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란?

인천의 선사문화를 논함에 앞서 먼저 선사문화 또는 선사시대란 무엇을 말함인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선사시대란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를 일컫는데 인류의 전역사에 있어서 이 기간이 매우 길다.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하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역사시대에 접어들기까지의 기간을 비율로 따지자면 약 99%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사시대를 구석기시대로부터 철기시대 전기까지로 잡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에 맞추어 인천의 선사문화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겠다. 인천시는 원래 초기(비류) 백제가 건국되었다고 전해지는 미추홀(彌趨忽)로부터 출발한다. 그 뒤 매소홀(買召忽)-경원군(慶源郡)-인주(仁州) 등의 지명을 거쳐 조선 태종 13년(1413)에 비로소 오늘의 인천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인천부(仁川府)의 위치를 갖고 있었다. 광복후 1968년 인천에는 불과 중구, 동구, 남구, 북구의 4개 구가 있었으나 1981년 직할시가 되었으며 1989년부터 김포군 계양면과 옹진군 용유면, 영종면이 편입되어 직할시 면적이 급격히 팽창되었다. 1995년 또다시 강화군, 옹진군, 김포군 검단면이 편입되어 인천광역시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인천시에 분포하는 유적의 수도 급격히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최근에는 영종도의 신공항 건설로 인해 많은 유적들이 발굴,조사되어 보고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인천에서 생활을 영위했던 아득한 옛사람들의 문화, 즉 인천의 선사문화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석기시대란 돌을 떼내어 날카롭게 만든 것으로 도구를 삼았던 시기를 말한다. 그리고 이 시기의 생업은 사냥과 채집이었다. 이런 설명은 종종 구석기시대를 매우 미개하고 단조로운 시대로 얕잡아보는 선입견과 결부되는데 이는 사실과 매우 다르다. 돌을 떼어내는(打製) 수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매우 발전되어 갔고 마침내 후기 구석기시대의 석기제작 수법쯤 되면 떼기가 매우 복잡해지고 숙련된 기술을 요하기 때문에 사실상 오늘날 이런 제작수법을 흉내낼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의 구석기학자에 불과하다.

 즉 돌감을 가지고 미리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떼어낼 것인지를 완전히 추상해 볼 수 있는 인지능력과 생각한 바를 그대로 실행할 수 있는 뛰어난 솜씨 등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천에서는 아직 구석기유적 발견 사례가 없다. 그러나 최근의 강화도 내가면 오상리 고인돌 유적(인천시기념물 16호)과 연수구 문학산 종합경기장 옆 지표에서 구석기시대의 "팔매돌(bola)"과 양인석기(chopping tool), 망치돌 등 구석기 유물의 발견례를 참고한다면 앞으로 그 가능성은 매우 높다. 첫번째 가능성은 한국의 전역에서 구석기시대 유물들이 매우 다발한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되며, 두번째 인천시에서 매우 가까운 고양 일산지역에서 우수한 구석기시대 유물들이 자주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천시의 구석기시대 존재를 확인하는 일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석기시대 존재는 인천지역에서 매우 많고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대체로 1990년대 이전에는 서해상의 옹진군, 강화군 등지에서 패총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최근들어 영종도 신국제공항 건설에 대한 기초작업으로서 발굴조사된 성과를 보면 육지에 가까운 지역에서 집자리, 야외노지 등이 찾아지고 있어 당시 사람들의 생활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

 옹진군, 강화군 등지에서 그간 찾아진 신석기시대의 패총은 무수하다. 이를 꼽아보면 백령도, 시도, 승봉도, 소야도, 연평도, 우도, 장봉도, 모도, 덕적도, 굴업도, 볼음도, 신도, 아도 등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 그리고 조사가 많이 이루어진 강화도, 영종도, 삼목도, 영흥도 등지에서는 한섬 내의 여러 지점에서 패총발견이 보고되고 있다. 1999년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덕적군도 일대에 대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백아도, 울도, 문갑도 등 그간 조사되지 않은 섬에서도 모두 패총의 흔적 및 유물을 찾아내었으며 특히 소야도 등의 경우 현재 민가가 있는 해안선은 거의 모든 지역이 한때 패총이었다고 보일 정도로 빽빽히 분포되어 있다.

 최근에는 인천지방의 신석기시대 유적에 대한 발굴이 행해지고 있는데 삼목도와 송산유적, 영종도 운서동 등지에서 집자리, 수혈, 야외노지 등이 찾아지고 있어 앞으로 패총뿐 아니라 당시의 취락, 그리고 사회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패총이나 집자리에서 나오는 인공유물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빗살무늬토기다. 인천에서는 서해안의 특징적인 반쪽 계란 모습을 띠며 빗살무늬 자체는 다소 생략되었거나 흐트러져 있다. 만들어진 시기는 대략 기원전 2000년~기원전 1000년 사이에 해당된다.

 인천의 청동기시대에 대해 살펴보자.

동기시대란 청동합금을 이용해 생활에 필요한 제반도구가 만들어지면서 이의 사용을 전후로 일어나는 사회의 변화, 즉 청동제작을 위시한 기술의 발달, 생산력의 증가로 인한 잉여생산의 축적, 분업 및 전문직의 발생, 계급의 분화로 인한 사회계층화 등이 생겨나는 시기다. 인천에서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활동했던 사실은 당시의 무덤인 고인돌이 가장 잘 증거해 준다. 남구 문학동, 서구 대곡리, 연수구 학익동 고인돌 등이 유명하다. 강화도는 특히 고인돌 다발지역으로 부근리, 오상리, 대산리, 신봉리, 신삼리, 하도리, 상도리 고인돌 등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사회발전단계를 웅변해주는 것으로 사회계층화의 결과 출현한 족장의 존재를 잘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논자에 따라서는 고인돌 같은 무덤은 노동력의 품앗이로서 계층화되지 않은 사회에서도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최근 발굴결과를 보면 묘역을 포함하는 고인돌의 지하 매장구조가 방대하고, 관옥이나 비파형단검 등 계급과 신분을 상징하는 부장품들이 출토되고 있어 계층사회의 증거가 틀림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천에서 아직 청동기시대의 집자리는 거의 찾아지지 않았지만 인천시 전역에 걸쳐 찾아지는 수많은 간도끼, 간돌검, 슴베있는 간화살촉, 반달칼과 공영토기 등의 존재는 당시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았음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발굴된다면 앞으로 많은 집자리가 드러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토기는 인천의 경우 입술을 곱싼 밑에 짧은 빗금을 그은 팽이토기, 그리고 화분형토기가 특징적이다. 청동기가 보고된 바는 아직 없다.

기시대 전기(기원전 300년에서 1년까지)에 속하는 인천의 자료는 현재 매우 소략하다. 다만 연수구 청학동 패총주변에서 회색의 타날문토기가 찾아진다고 보고되어 있어 철기시대로 생각할 가능성이 있는 정도다.(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세형동검 한자루는 출토지명 미상임) 그러나 신석기~청동기시대의 예로 보아 인천지방의 철기시대에는 사람들이 더욱 많이 살았을 것이 틀림없으며 곧 이은 철기시대 후기(기원후 1년~기원후 300년)는 바로 삼국시대 전기로서 역사시대에 해당된다. 이미 이 지역을 바탕으로 한 건국설화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더라도 인천의 철기시대 전기는 매우 활발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같이 인천의 선사문화는 신석기~청동기시대에 걸쳐서는 자료도 많고 다양하지만 구석기와 철기시대 전기의 고고학적 자료는 거의 없는 편이다. 앞으로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겠다.

 한편 유적의 보존문제도 심각한 편이다. 인천시는 최근들어 급격히 발전, 팽창되어온 반면 수많은 유적의 파괴, 생태계의 파괴도 동시에 수반되고 있는 이율배반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영종도 신국제공항 건설사업으로 인해 알려진 유적도 많지만 그 부정적 측면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다.

 서울대 박물관의 1999년도 덕적군도 조사에서도 이런 현상은 잘 나타났다. 필자가 1967년 조사,보고한 덕적, 소야도의 패총들은 흔적도 없는 것이 많았으며 그나마 남아있는 것들도 급속히 파괴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특히 인천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패총에 대한 정식 발굴조사가 드물어 당시의 문화에 대한 복원이 어려운 만큼, 이들에 대한 보존과 체계적인 조사연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