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강옥엽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39) 인천의 상록수, 길영희
▲ 제물포고등학교 교정의 길영희 선생 동상.

'지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 '유한흥국(流汗興國)'과 '위선최락(爲善最樂)' 그리고 영원한 스승. 석두(石頭), 계몽운동가, 한국의 페스탈로찌 등의 표현은 인천 교육의 개척자 길영희를 상징하는 대표적 키워드들이다.

2015년 인천이 지향하는 '가치 재창조'는 인천 역사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구슬들을 몇 가지 특징으로 꿰어야만 생성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양심과 소신의 자율교육을 실천했던 길영희는 인천의 정신적 자산이라 할 것이다.

출생과 성장

길영희(吉瑛羲·1900~1984)는 음력으로 1900년 10월 9일 평안북도 희천군(熙川郡) 희천면 읍상동(邑上洞) 92번지에서 부 길헌태(吉憲泰)와 모 양찬린(梁燦麟) 사이에서 3대독자로 태어났다. 해평 (海平) 길씨 집안의 장남이었던 그는 세명의 동생들과 함께 유복한 환경 속에서 자랐고 뒤에 모두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 길영희 선생.
아버지 길헌태(1866-1933)는 근대 민족교육에 일찍 눈떠 희천에 유신학교(維新學校)를 창설해(1904)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을 주지로 신학문과 함께 구학(舊學)도 병행하는 교육을 펼쳤다. 초대 평안북도 평의원을 지냈던 부친은 봉건적 습속에 머물지 않고 근대 사조에도 밝아 자식들은 자연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가 성장하는 과정에는 정신적으로 영향을 준 인물들이 있다. 첫 번째는 5세 때(1904) 한학(漢學)을 수학하기 위해 멀리 태천군(泰川郡)에까지 가서 사숙(私塾)에 들어 공부하면서 한학자였던 박운암(朴雲庵)선생으로부터의 가르침이 그가 교육자의 길로 들어서기로 결심하는 데 큰 힘이 됐다.

한학 공부를 마친 후인 13세(1912)에 희천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근대 교육을 받았다. 이때 두 번째로 그의 인생관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 일본 동경대학교의 교수 마에다(前田慧雲)의 강연이었다. 이를 듣고 "만대의 만인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과 스스로의 양심에 거리낌이 생기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신념이 형성됐다.

19세에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3·1만세운동 때 학생 대표로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돼 6개월 징역에 집행유예 3년 선거를 받고 학적을 박탈당했다. 이후 배재고보를 거쳐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0세에 배재고보에서 처음 교직을 시작했지만, 3개월 만에 경신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경신학교에서는 사학자 이병도의 후임으로 역사와 지리를 담당하면서 자신이 뜻한 바 민족교육에 열정을 다했다.

1938년 인천 만수동에 실학자들의 '이용후생(利用厚生)' 의 의미를 담은 이상촌, 후생농장(厚生農場)을 건설하면서 농업 입국의 투지를 펴기 위해 경신중학교를 사임했다. 그는 자신이 가는 길에 확신을 가질 만한 정신적 원천을 가지고 있었다. 36세 때인 1935년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교유하면서 민족의 장래에 관한 교화를 받았는데, 교단에 설 때는 물론, 농촌사업을 전개함에 있어서도 도산의 무실역행(務實力行) 사상은 그의 정신적 원동력이 됐다.

양심에 따른 자율 교육의 효시

만수동의 후생농장을 기반으로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1945년 광복을 맞자 그는 인천 유지들의 추대로 인천중학교 초대 교장에 취임했다. 혼란의 격동기 속에서도 선우휘, 조병화, 피천득 등 기라성 같은 선생님들을 인천중학교에 초빙해 민족교육과 영재교육에 전력을 기울였다.

영재교육의 실천은 6·25전쟁 후 문교부 주최 전국학술경시대회에서 3연승 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1956년에는 제물포고등학교를 인가받아 교장에 취임했는데, 취임 직후 '무감독 시험제'를 실시했다. 또, 교지 <춘추>를 발간해 1960년 전국고교 교지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당시 인중과 제고에는 학생들에 대한 규제와 통제가 없었다. 이른바 '3무 방침'이란 것이 있어서 시험에 감독이 없고, 학생생활에 규율부가 없고, 공부하는 학교에 운동부가 없는 것이 바로 '3무 방침'이었다. 특히, "양심의 1점은 부정의 100점보다 아름답다."라는 선서를 하며 일체의 허식을 버리고 오직 '양심에 따른 자율'을 지향해 우리나라 초유의 무감독 시험제도를 시행했다.

또한 학생 주관 월례조회 제도, 전문 운동부가 없이 학생 모두가 체육부원이 되는 학교, 교사의 글은 단 한 줄도 학생 교지에 실리지 않는 학교, 한국 중·고교 최초의 대규모 개가식 도서관을 가진 학교 등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6·25전쟁으로 페허가 된 나라를 이끌어 갈 인재 양성 교육을 강화해 주요 명문대학교 전체 수석 및 단과대 수석을 차지하고 많은 합격생을 배출하는 성과를 가져왔다.

'양심은 민족의 소금, 학식은 사회의 등불' 은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고, 이것은 곧 학생들이 땀 흘려 공부할 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흥할 수 있다는 '유한흥국(流汗興國)'과 인성교육의 기반이 된 실천하는 선이 최고의 즐거움이라는 '위선최락(爲善最樂)'의 가르침이었다.

행동하는 만인의 사표 師表

1961년 정년퇴임을 하고 자택에 대성학원(大成學園)을 설립, 경영하다가 1967년 충남 예산에 가루실 농민학원을 설립하고 1984년 생애를 마칠 때까지 이끌어 갔다. 가루실 농민학원은 1972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한 이후 1979년 2월 제8회 졸업생 10명을 배출하고 마감됐다.

길영희는 근대의 길목에서 암흑의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광복과 새로운 전환점에서 체제와 이념의 갈등 현장인 6·25전쟁을 체험했던 그야말로 근대와 현대의 격동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또, 지금과 같은 도시발전의 토대를 양생한 1960~70년대 이른바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산업과 건설에 매진했던 과도기 사회도 목도했다.

따라서 그의 삶과 교육 철학은 이러한 시대적 과제들을 직시하고 현실 극복을 위한 방향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교육방식에 대한 찬반론에도 불구하고, '묘목에 더 좋은 품종을 접목해야 온전한 과수가 되는 것처럼, 좋은 인재에게 훌륭한 미래를 접목시키는 것'이라고 하는 길영희의 교육론은 이 시대 진정한 사표(師表)로 그 정신적 가치를 더하고 있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