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맹정음 창시자 박두성의 딸 박정희 여


 

   
▲ 박정희(89) 할머니는"아버지는 제자들에겐 자상했지만 자식들에겐 스파르타식 교육을 해, 많이 맞고 자랐다"며"처음엔 의붓아버지인 줄 알았지만 어른이 돼서 아버지가 위대한 사상가이자 교육가임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박 할머니가 자신의 인천시 동구 화평동 화실에서 아버지 송암 박두성 선생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다. /박영권기자 pyk@itimes.co.kr

오는 4일은 '제 85회 점자의 날'이다.

인천 출신 송암 박두성(1888~1963) 선생이 1926년 시각장애인이 손가락으로 더듬어 읽는 특수 부호인 '한글점자' 창안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훈맹정음'을 만들어 우리나라 시각장애인들이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어준 송암은 '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그는 인천시 중국 율목동 25번지에서 가족과 함께 살다 1963년 타계한다. 그 때까지 아버지를 모시고 산 딸 박정희(89) 여사는 현재 동구 화평동에서 살고 있었다.

지금의 집은 의사였던 남편이 세를 얻어 병원을 운영했던 자리다. 지난 달 29일 '인천의 그림할머니'로 유명한 박 여사를 찾아갔다.

그녀가 기억하는 아버지 송암 선생은 세상에 알려진 '위대한 교육가'라기 보다는 자신의 제자들인 시각장애인들이 험난한 세상에서 어떻게든 자립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애쓴 '소박한 선생님'이었다.



잠깐동안 비가 내려 흐린 가을 아침. 철커덕 철커덕, 화평동 냉면골목 위 경인철로로 전철이 지나가고 있었다. 전날 휴대전화를 받은 박 할머니는 "고향냉면과 삼미냉면 사이를 보면 커다란 벽화가 있을 거예요. 거기로 오세요."

89세 노인의 음성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단호하고 명료한 목소리였다.


두 냉면집 사이에 서 있는 허름한 4층 건물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젤과 물감, 몇 개의 정물화와 풍경화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실내는 화실의 풍경을 하고 있었다. 화실 안쪽에 난 나무 문으로 할머니 한 분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동그란 얼굴에 헝겊모자를 쓴, 어찌보면 소녀 같은 할머니가 기자를 향해 안경 너머로 시선을 고정한 채 걸어나왔다.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것 같은 통찰력 깊은 눈빛이 기자를 바라 보았다.

"앉으슈."

 

   
▲ 훈맹정음이 반포되었음을 알리는 신문기사(조선일보 1929년 7월29일자). /자료=<점자로 세상을 열다>

할머니가 한 켠에 놓은 4인용 원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인사 뒤 자기소개를 한 기자가 말을 쉽게 풀어나가기 위해 "송암 선생님의 몇째 딸이세요?"라고 물었다. 잠깐동안 침묵이 흐른 뒤 할머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은 말야, 내가 몇째 딸인지 헷갈려. 셋째딸 같기도 하고 둘째딸이기도 하고, 맏딸이기도 하고… 이 세가지를 다 부인할 수가 없거든."

그의 말인즉슨, 자녀 넷을 낳은 송암의 첫째 부인이 집을 나가 개가한 뒤 다시 결혼을 했다. 이후 송암이 재혼을 했는데 자신은 그 둘째 부인의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몇 째 딸이라고 꼭 집어서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유와 유머가 넘쳐 흐르는 답변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처음 결혼을 한 뒤 4자녀를 낳고 부인이 도망을 갔어. 이 거지 같은 양반을 도저히 못 받아들이겠다고…. 그렇게 그 뒤 홀아비로 지냈는데 아버지가 서울 정동교회 교인이었거든. 나를 낳은 어머니 김경례란 분 역시 정동교회 교인이었는데 그 이가 아주 재원이었어. 그런데 교회 전도사였던 우리 외삼촌이 그 당치도 않은 홀아비가 가엾다며 우리 어머니더러 시집을 가라고 권면했다는 게야."

한의사였던 아버지를 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협성대를 졸업한 김경례에게 이상한 글자판에 정신이 팔린, 그것도 아이가 넷이나 달린 홀아비에게 시집을 간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외삼촌 빼고는 주변에선 홀아비에다 집도 없는 거지라고 말렸다고 하더군. 그런데 아마 시집 가라는 세력이 더 강했던 모양이지? 결국 우리 어머니와 결혼을 했지. 그리고 5남매를 낳았어. 우린 모두 9남매가 된 거야."

두번 째 결혼 후에도 송암은 점자에만 매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제생원'에 함께 근무하던 옆집에 살던 일본인 '네모토 가이조' 씨가 아버지를 찾아왔다. 때는 일제강점기였고 송암은 조선총독부가 운영하는 장애인 수용시설인 제생원 맹아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일본 사람이 어느 날 아버지를 찾아와 말하길 밤마다 맹생(시각장애인)들 데리고 한글 점자 창안한다고 연구하는 것 잘 알고 있다고 말하며 한국어를 못 쓰게 하는데 한글점자를 만들면 총독부에서 잡아갈 지도 모른다며 걱정을 했다는 게야. 당시 아버지는 밤마다 앞 못 보는 사람 6명을 데리고 점자를 만들고 있었거든."

그 말은 들은 송암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형편에 지금 애국이니 뭐니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난 정치가 뭔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이 사람들이 앞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데 점을 치고 살아도, 침을 놓아도 모든 책이 우리말로 돼 있기 때문에 우리말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글을 알아야 하는데 맹생이라 점자가 꼭 필요하니 어쩔 수 있겠소. 내가 무슨 대단한 뜻이 있어서 그런게 아닙니다.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제생원에 왔고 내가 가르치는 맹생을 보니 그들이 굶지 않게 하기 하려면 글을 알아야 하기에 한글점자를 연구하는 것 뿐이라오."

송암의 점자연구는 이처럼 제자들의 먹고 살길을 마련해준다는 소박한 뜻에서 시작됐다. 박 할머니의 얘기가 계속됐다.

"당시엔 장님들이 집 앞을 지나가면 재수가 없다며 지나다니지도 못하게 하던 시대였어. 아버지는 예수쟁이였어. 장님도 장님이었지만, 시각장애인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벌을 받을텐데, 그래선 안된다며 점자에 더욱 전념한거지."

제자들에게 헌신적인 송암의 자녀교육은 어땠냐고 물었다.

"스파르타식 교육자야. 난 회초리도 많이 맞았어."

박 할머니는 여덟 살부터 아버지 옆에서 성경을 읽어야 했다. 성서점역을 위해서였다. 여덟살 짜리 아이가 성경을 읽으면 아버지는 제판기를 사용해 아연판에 철컥철컥하고 점자를 새겨나갔다.

"성경을 읽다보면 거듭난다는 말이 나왔는데 나는 속으로 '거듭난다는 게 뭐야'라고 생각했고 건너뛰어 읽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 그렇게 잘못 읽으면 어김없이 그 아연판을 들어 날 때리는거야. 얼마나 아팠는지 몰라."

그렇게 만든 성서점역을 아내 김경례 여사는 한 장 한 장 손으로 엮어 책자로 만들었다. 여덟살배기 딸은 글을 읽고, 아내는 책을 엮고, 온 가족이 점자책을 만드는데 뛰어든 셈이었다.

인천 강화 출신인 송암이 서울에서 살다 귀향한 때는 1936년이다. 총독부의 권고사직을 당한 송암은 그의 성실성과 열정을 인정한 기독교계의 도움으로 인천영화학교 교장으로 부임한다.

"그 때 가족이 모두 인천으로 왔지. 율목동 25번지가 우리 아버지 집이야. 여기는 의사였던 우리 남편이 세를 얻어 병원을 하던 자리고 장터였지. 남편 이름이 유영호인데 아주 유명한 의사였어요."

이후에도 송암은 조선맹아사업협회를 조직하고 1957년엔 신구약성서 점역 전24권을 완성하는 등 점자 활성화에 전념하다 63년 타계(향년 76세), 인천시 남동구 수산동에 안장된다.

인터뷰를 하던 박 할머니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그림공부를 하던 제자들에게 다가갔다. 인터뷰 도중 들어온 2명의 여성이 한 켠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 옆에서 직접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며 자상하게 이것저것 설명해주던 할머니가 다시 돌아와 기자 앞에 앉았다.

"그렇게 어렵게 점자를 만들어놨는데 요즘은 사람들이 점자공부를 잘 안해. 손끝으로 읽는 그 기쁨을 모르고 TV나 휴대전화에 젖어 사는 거야."

박 할머니가 B학점 이상 시각장애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게 된 건 이 때문이다. 그는 2년 전, 송암장학회를 만들어 고문을 맡으며 지금까지 10명에게 100만 원씩 1천만 원을 전달했다.

"대단한 돈은 아니지만 나로선 까무러칠 만한 돈이야. 좌우간 씨는 뿌려놨으니 잘 됐으면 좋겠어."

2시간 정도의 인터뷰를 마친 뒤 인사를 하며 일어서는데 박 할머니가 다시한번 안경 너머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촌철살인의 마무리 멘트를 직격탄으로 날려보냈다.

"잘 추려서…, 나를 부각하지 말고 점자의 중요성을 알려야 해. 진부하게 쓰면 안돼, 반짝 반짝하는 글을 써야 돼."

"! … 네, 잘 알겠습니다"라고 다시한번 고개를 숙인 뒤 서둘러 박 할머니의 화실을 빠져 나왔다.

비는 그쳤지만 날은 여전히 흐려 있었다. "철커덕, 철커덕!" 커다란 소리를 내며 또다시 전철이 지나가고 있었다. 송암 선생이 아연판에 점자를 새기는 '철컥 철컥' 소리가 오버랩됐다.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