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의 초승달 지역'을 따라서2-2 사막 속 오아시스, 팔미라 제국을 찾아가다


사막 길에서 보이는 것은 오직 하늘과 모래, 햇볕 그리고 하늘 높이 모래 기둥을 만들어 올리는 바람뿐이다.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는 한낮의 사막을 횡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비록 현대문명의 이기(利器)라는 자동차라 해도 마찬가지다. 자동차정비소는 물론 휴게소조차 없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고장이라도 나면 꼼짝없이 사막에 갇히기 때문이다.

 

   
▲  끝내 사막의 전설로 그치고만 제노비아 여제의 꿈을 수천년째 간직해 온 오아시스 제국'팔미라'전경.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와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는 직선거리로 약 600㎞다. 두 도시사이는 온통 사막지대뿐인데 이러한 사막의 한 가운데에 오아시스 도시 팔미라가 있다.
자동차는 물론 길도 불편하던 시절, 실크로드 대상(隊商)들도 이 사막을 건넜다. 수십 마리에서 많게는 천

   
▲ 오랜 풍상에도 남아있는 열주대로. 과거 이곳에는 상점과 사원 등이 양쪽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마리가 넘는 낙타의 행렬이 사막을 횡단했는데, 낙타 한 마리당 170~280㎏의 짐을 싣고 하루 평균 40㎞를 행군했다. 사막에서 백골이 되지 않으려면 사막을 빨리 벗어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막은 끝없고 태양은 숨을 조이니 힘을 충전할 수 있는 휴식처가 절실하다.
영국의 추리작가 아가사 크리스티는 팔미라를 '모래사막 한가운데 땅 속에서 솟아오른 환상적인 도시'라고 평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팔미라는 실크로드 대상들에게 있어서 더할 나위없는 낙원인 것이다.
'사막 속의 초록궁전' 팔미라는 오늘도 에프카라고 불리는 샘에서 끊임없이 물이 솟아나고 있다. 팔미라의 원래 이름은 타드몰(Tadmor)인데 이는 고대 셈족어로서 야자수라는 의미다. 고대부터 오아시스 도시였음을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오아시스 도시 팔미라는 사막을 오가는 대상들의 쉼터뿐 아니라, 동서무역을 이어주는 교역도시였다.
팔미라가 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 이점을 잘 활용한 결과였다. 또한 장거리 무역을 장악했던 나바타이 왕국의 수도 페트라가 로마제국에 편입되고, 로마가 동쪽의 페르시아를 넘볼 때 팔미라의 낙타군대가 로마군의 지원을 받아 사산조의 시리아 침략을 격퇴하는 등 발 빠른 대처를 한 결과였다. 이를 통해 팔미라는 로마 황제로부터 자유도시로 인정받아 관세를 설정, 징수하는 권한을 얻어냄으로써 제국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다졌다.
이때부터 동쪽의 중국, 페르시아, 이라크에서 들어오는 모든 무역상품은 반드시 팔미라를 통과하여 서쪽 다마스커스 및 지중해 연안의 티르 무역항으로 운송되었다. 이 과정에서 팔미라는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 팔미라 유적을 대표하는 벨 신전

팔미라는 엄청난 경제력을 바탕으로 거대한 국가를 건설했다. 팔미라를 대표하는 벨 신전을 기점으로 도시를 동서로 횡단하는 열주와 중심도로가 만들어지고, 신구시가지를 연결시키는 개선문과 원형극장, 의사당과 시장, 주택과 목욕탕, 장례제당과 탑묘(塔墓) 등 차례로 들어섰는데 이는 지금 대부분 폐허로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팔미라가 엄청난 규모의 도시국가 였음을 알려준다.
또한 팔미라의 경제력은 로마도 넘보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고, '중동의 클레오파트라'로 불린 제노비아 여왕 때는 로마의 속주에서 벗어나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야심은 도를 넘어서게 되고, 이를 용인할 수 없는 로마의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팔미라를 정복했다. 그녀의 야심이 팔미라의 발전을 이룩했으나 그 야심이 도를 넘자 곧바로 팔미라의 몰락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팔미라는 사막의 실크로드 대상교역로를 지배하고, 오아시스 상업도시의 이점을 살려 단기간에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다. 즉, 대상들의 숙박업소 및 각종 편의시설들을 갖추고 거기서 나오는 비용과 통관세 등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것이다. 국력 증강과 영토 확장에 주력할 때도 팔미라를 거치는 실크로드 대상들은 아무런 방해 없이 교역활동을 보장받았다. 실크로드 대상들이 반드시 팔미라를 거쳐 무역을 하도록 제도와 기반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동북아 허브도시를 꿈꾸는 인천엔 송도경제자유구역이 있다. 그러나 활성화는 아직도 요원하다.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부터라도 정치적이고 이해 타산적인 논의는 배제시키고 오로지 '경제자유구역'에 합당한 제도와 기반을 만드는데 매진해야 한다. 그래서 세계의 유수 기업들이 인천에 매력을 느끼게 해야 한다. 인천이 동북아를 주름잡는 허브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진심어린 일체감을 바탕으로 미래지향적이고 발전적인 투자가 병행되어야 한다. 팔미라는 말한다. "지리적 이점은 신이 주신 것이다"라고.



<'동방의 클레오파트라' 제노비아>
 

   
▲ 제노비아 흉상

셉티미아 제노비아(Septimia Zenobia) 여왕은 로마의 식민지였던 팔미라를 로마로부터 독립시켜 거대 제국으로 만들었던 여걸이다.
남편인 오다이나투스가 팔미라의 로마 속왕에 만족했던데 반해 제노비아는 야심이 많은 여왕이었다. 그리하여 남편이 암살당하자, 어린 아들 바발라투스의 섭정(攝政)이 되어 국정을 지배했고 스스로를 팔미라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여 269년에 이집트를 점령하고 이어서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그리고 곧바로 로마에 독립을 선포했다. 또한 바발라투스로 하여금 그의 아버지의 칭호인 '온 동방의 통치자'를 사용하게 했다.
제노비아 여왕의 야심찬 행보에 분개한 로마의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오늘날 터키의 안타키아와 시리아의 홈스에서 제노비아 군대를 격파하고 팔미라를 공략했다.
결국 제노비아와 바발라투스는 붙잡혀 로마로 압송되고 팔미라는 항복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273년, 팔미라인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아우렐리우스는 팔미라를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빼어난 미모 덕택인가. 제노비아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과 결혼해 지금의 이탈리아 티볼리 근처의 남편 별장에서 조용히 생애를 마쳤다.


시리아=인천일보-인하대 실크로드탐사취재팀
/조태현·남창섭기자 csnam@itimes.co.kr
/허우범 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
/취재협조=주레바논 한국대사관·주요르단 한국대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