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프·붓으로 써내려간 '그림 수상록'
8일까지 서울 인사동서 열일곱번째 개인전 '에세이'

자아성찰 주제 … "나를 사색케 하는 자연서 모티브"




"제대로 된 개인전은 실로 오랫만입니다. 이번 전시는 지금까지의 작업들을 정리하는 한편, 앞으로의 방향성을 잡아내는 지점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김혜선 작가가 열일곱번째 개인전을 열며 던지는 의미다. 재료와 기법에 대한 실험에 몰두해왔던 그다.
'자아성찰'이란 주제도 결코 가볍지 않다. 어느 시점을 넘기면서 밝아지고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편안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일렁인다.

소재의 선택도 자연물로 옮겨갔다. 바쁜 일상속에서 문득 스쳐가는 사소한 기쁨에 다다른다. 그래서 이번 작업 제목이 '에세이'다. 지난달 28일 개막, 11월8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 갤러리 '갤러리 더 베이스먼트'에 결실들을 내놓았다.

#. 편안하게 읽혀지는 그림

이번 전시 앞에 '제대로 된'이라는 부연설명을 다는 이유를 묻자, 가능한 한 대외활동을 밀어두고 작품에만 몰두해 얻은 작품들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작가 스스로 꼽는 전시는 2006년 같은 건물 인사갤러리에서의 초대전. 이후 3년여만이다. 물론 그 사이 크고 작은 부수전이 여럿 있다. 인천아트페어 운영위원장(2008년)을 맡아 동분서주한 기간도 그 안에 있다. 작정하고 그림을 그려보긴 참으로 오랫만이라고 말한다.

"지난해는 온통 작품에만 매달렸습니다. 늘 작업에 목말라하던 나였기에 너무나 소중한 시간들이었지요. 더 더욱 즐거웠던 것은 편안하게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지요."

그동안 해온 작업 경향을 살펴보면 작가가 던지는 말의 의미가 다가온다. 이전의 작품은 다분히 경직돼 있다. 자아성찰이라는 내면의 고민은 자연히 무거운그림쪽으로 나아갈 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재료에 대한 실험성이 누구보다 강한 그였다. 긁어내고 붙이고…, 자신만의 기법을 찾아가는 실험인 것이다.

이번엔 달라졌다. 의도적으로 쉽게 그리려 했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편안한 그림을 그리려 했다. "예전엔 아집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지언정 재료에 대한 실험에 스스로 만족하는 경향이 있었지요. 지금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에 관점이 가 있습니다." 하룻밤의 일기처럼 에세이를 쓰듯 신나게 그렸다. 떠 오르는 생각을 쫓으며 속도를 내기 위해 나이프 혹은 백붓으로 그리기도 했다.
"하룻동안 나를 사색하게 하는 자연물에서 모티브를 얻었습니다."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 공간 혹은 자연과의 조합

가벼움만 있는것은 아니다. 가야할 방향에 대한 고민은 늘 내재돼 있다. 이번에는 공간과 작품과의 조합, 혹은 자연과 작품과의 조합에 머물러 있다.

전시장에 간다. '이곳에 내그림을 넣는다면 어떠한 공간이 연출이 될 까'하는 상상을 한다. 한쪽 벽면에 작품을 걸어본다. 추상적인 기둥을 하나 세워본다…. 그 공간을 화폭에 옮긴다. 100호 짜리 작품 '상상공간'은 그렇게 완성됐다.

이번에는 심연의 짙푸른 바다를 옮겨온다. 한대의 피아노 떠 있다. 그 위엔 작품이 걸려있다. 바다와 피아노와 작품의 조합이다. 깊은 바다의 차가운 선율이 넘실대는 느낌이 물씬하다. 그래서 작품명을 'SS(여름 소나타)-2009'로 붙였다.

"공간과 작품과, 혹은 바다와 피아노의 조합에서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무의식에 깔려 있는 이미지를 들춰내 조합하는 것입니다. 그 이미지들은 일상의 흔적이 베어 있는 형상, 또는 용기가 폐기된 추억의 오브제들이지요. 앞으로 하려는 작품이 이런 작품들입니다."

지난 2년여를 몰두해 완성한 작품들이 꽤 많았다. 즐겁게 해나간 작업이기에 힘든 줄 전혀 몰랐다. 인사갤러리가 리모델링해 '갤러리 더 베이스먼트'를 개관하면서 기획전으로 그를 불렀다. 전시장에 잔뜩 싸 들고 갔다. 많이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작품을 걸면서 욕심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00호짜리 4점을 포함 20여점을 걸었다.

#. 또 다른 역할 큐레이터

올 3월부터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 하나 늘었다. 중구 학생교육문화회관에서 전시기획을 하는 큐레이터로서다. 그 이전에는 다분히 작가로서 자기중심적이었다. 이젠 스스로의 작업보다 다른 이들의 작업을 보여주는 일에 온통 관심이 가 있다. 분명 이전에 해본 적이 없는 낯선 일들임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신명 나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의 장르가 현대미술 추상이라는 이유로 큐레이팅에서 편식을 하지 않을 까 우려하는 시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더 더욱 장르의 폭을 넓히려 노력했습니다. 목표는 오직 하나 좋은 전시를 보여주는 것이니까요." 7개월이 어떻게 지나갔는 지 모른다. 많은 전시를 열었다. "주위에서 도와 주셨습니다.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내년 기획전이 모두 20건에 달한다. 기획안은 이미 완성했다. 5월 '책을 읽는 갤러리'와 10월 '인천 유명인이 추천하는 10인 작가전'은 욕심을 내 준비하고 있는 전시라고 귀뜸한다.

"스스로 확장되는 시간이라고 느낍니다. 쉽게 얻을 수 없는 행복이지요. 이 일들은 또 다른 면에서 작가로서 즐겁게 작업할 수 있는 힘입니다." 어느 때보다 에너지가 넘쳐보인다.

/김경수 kks@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