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화가 꿈 키우다 연극 접한 후 연출 결심
대통령취임식·올림픽 등 굴지 행사 맡아
'사랑과 죽음의 유희' 관객과 만남 준비중


인천시립극단이 가을 정기공연으로 로맹 롤랑의 '사랑과 죽음의 유희'를 골랐다.

프랑스 혁명 후 공포정치가 한창이던 18세기 말, 프랑스 역사의 변화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다양한 세계관에 주목한 작품이다. 이번 공연 역시 이종훈 인천시립극단 예술감독 손에서 빚어졌다. 공포정치가 행해지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 무거운 분위기의 작품이어서 고민도 많았다.

오는 16~25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에서 관객과의 만남을 준비중인 이 감독을 만나봤다.


#. '사랑과 죽음의 유희'를 준비하면서

이번 연극에 교향악적 휴먼드라마라는 부제를 붙였다.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1790년대 프랑스,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라는 혁명가에 의해 공화국이 탄생한다.

그 과정에서 왕정이 붕괴되고 많은 이들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다. 그런데 당통마저 동지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죽게 되는 상황이 된다. 주인공 '제롬'은 공화장에서 당통의 처형 승인을 강요당하지만 투표도 않고, 반대도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에 좌절한다. 그런 그를 아내 '소피'가 위로하지만 소피는 '발레'라는 젊은 혁명가를 사랑한다. 발레는 지롱드당의 젊은 혁명가다. 이들은 비극적인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혁명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각자의 사랑을 구원하는 방식을 찾는다.

이 감독은 "여름엔 야외 공연이라 관객과 호흡할 수 있는 대중적인 작품을 선택하는 반면 가을엔 정통 문학작품을 바탕으로 한 공연을 선보인다"며 "어려운 작품이라는 인식을 떨쳐내기 위해 많이 노력했는데 국공립단체로서 이 같은 문학적인 공연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원작을 읽자마자 극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쉽지만은 않았던 선택이었다.

"배우들이 일대일로 드라마를 끌고 가기 때문에 연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품입니다. 개인 독백도 많고 시대적 배경과 얽힌 다양한 감정연기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죠. 엄밀히 따져 사실 우리 단원들이 하기엔 무리라 생각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외부 배우 출연도 고민했지만 그럴 경우 얻는 것보다 잃는게 더 많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혹독하게 연습하고 이끌어왔는데 배우들이 열심히 해줘서 고마울 따름이죠."

이번 공연이 배우들로 하여금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그다.

#.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지난 2006년 7월 시립극단 예술감독으로 부임, 어느덧 3년이 흘렀다. 그 즈음 4개 단체의 합동공연 '심청왕후'에서 객원 연출을 맡은 게 인천 착륙 계기가 됐다.

이전엔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서울시 뮤지컬 단장, 서울예술단 등을 지냈다. 예술의 전당 개관기념 공연과 대통령 취임 공연, 남북 공연 등 그가 연출한 작품만 해도 80~90편에 이른다. 대전엑스포와 환경엑스포, 서울올림픽 등 굵직굵직한 행사엔 늘 이 감독이 있었다.

"많은 작품을 했지만 손에 꼽을 만한 작품이 없어 부끄럽네요. 큰 공연을 많이 하긴 했지만 거의 3~4일만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장기공연을 하면서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는게 연극의 기본인데 그 부분이 아쉽죠."
고등학교 졸업 후 아마추어 연극활동을 하다 대학교 때 연극영화과에서 연출을 전공,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원래는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꿈이었지만 연극을 보고 난 뒤 도화지가 아닌 무대 위에서 입체적인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이따금 배우로 무대에 설 기회도 있었지만 배우는 본인의 길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 감독은 "배우는 무대위에 섰을 때 관객으로 하여금 이끌림을 느끼게 할 만큼 매력적이어야 한다"며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작품을 만든다 할지라도 작품의 꽃은 단연 배우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유독 사랑이야기 '연가'와 인연이 깊다. 첫 연출작 '땅콩껍질속의 연가'를 시작으로 '동숭동 연가', '지하철 연가' 등 그 가 연출한 연가 작품만 10여편에 달한다.

그런 이 감독에게도 끔찍한 기억도 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 비무장지대에 있는 멈춰버린 철마를 탄다는 이야기 '꿈꾸는 철마' 공연 중 기차가 떨어져 40여명의 배우가 크게 다친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아픈 기억이지만 아프지 않고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하는 그다.

#. 극단 20주년 기념공연

이 감독은 시립극단 장점으로 작업여건을 꼽는다. 장소섭외는 물론 세트, 조명, 음향 등을 설치하는게 조금은 수월하기 때문이다.

"이젠 전문적인 기술을 갖춘 스태프도 많아졌고 연기자 역시 중앙 무대는 물론 세계 무대로 진출하는 시대가 되면서 수준이 향상됐습니다. 하지만 인천 시민들은 여전히 중앙을 선호하는 것 같아요. 서울 공연은 보러 가면서 인천에서 하는 공연은 잘 안보는 편이더라고요. 지역에서 하는 공연에 관심을 가져야 지역 문화가 발전하는게 아닐까요."

그는 또 예술단체 발전을 위해선 관체제도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관에 묶이면 경직되기 때문에 발전은 커녕 정체한다는 이유에서다.

이 감독은 내년 7월이면 인천시립극단과 헤어진다. 장기적인 그림을 갖고 온 것 같은데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흘렀단다.

"내년이면 시립극단이 20주년을 맞습니다. 기념 공연으로 시민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을 생각하다 악극으로 결정했죠. 구체적인 계획이 나온건 아니지만 외부에서 배우들도 섭외해 멋진 공연을 해보겠습니다."
90여편이라는 많은 작품을 해오면서 다양한 연출을 해봤다.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한다는 욕심보단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게 그의 목표다.

/정보라기자 blog.itimes.co.kr/j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