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경색 후유증으로 고생 … 혼 깃든 작품 창작에 힘써
인천종합문예회관서 21~27일 회고전 … 150여점 선봬
예술·예술인(13)
인천 화단을 대표하는 원로 황병식 화백(82)이 미술인생을 돌아보는 회고전을 연다. 붓을 잡은 지 어언 60여년이다.

그림만을 위해 살아왔다. 이순을 눈앞에 둔 나이 그림에 몰두하겠다는 일념으로 교단을 떠난 그다.

붓을 내려놓아야 했던 원인은 외부로부터 왔다. 6년전 뇌경색으로 쓰러진다. 3년의 공백이 흘렀다. 다시 붓을 잡는다. 그 때 확실히 느꼈다. 그림이 삶의 전부라는 것을.

"회고전은 생애를 돌아보는 전시지요. 어떤 의미론 마지막 전시라고 할 수 있어요. '인생은 짧고 예술을 길다'고 하는데 살아 있는 동안도 그림을 지키지 못한다면 얼마나 어불성설이겠어. 그래서 회고전을 하며 화집을 묶으려 해요. 그럼 걱정은 없지. "


#. 회고전을 펴다
'스스로 청년이라 말하며 청년같은 열정으로 평생 붓을 놓지 않고 화단을 지켜온 황병식(한국미협·인천미술협회)고문님께서 어느덧 미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회고전을 준비한 추진위원회가 보낸 전시 초대장 문구다.
뇌경색의 후유증은 몸의 절반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오른 손은 건재했다. 화백을 따르던 후배들과 제자들이 진언을 고한다. 그리곤 얼마후 개인전을 열었다. 2년전 겨울 이야기다.

이번에도 그들이 나섰다. 초대장에 적힌대로 평생 한결같은 열정에 대한 존경심에서다. 홍윤표, 김낙준 작가 등 30여명이 마음을 더했다. 화백이 직접 지니고 있는 작품과 주위소장품 150여점을 모아 '황병식 회고전'이라는 타이틀을 걸었다. 오는 21~27일 인천종합문예회관 대전시실에 자리를 편다.

"제자들 아니었으면 엄두도 못낼 자리지. 제일 제쳐두고 나서 주었어요." 고마운 마음부터 전하는 화백이다.
회고전도 그렇거니와 그간의 작품을 담은 화집을 묶은 것이 못내 고맙다.

"화집이 필요하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은 작품을 소장한 이들이 천편일률적으로 관리를 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지. 관리를 못할 경우 망칠 수 있지 않겠어요. 실제 작품보다는 못하지만 화집을 만들면 그런 우려는 없앨 수 있지 않겠나 했지."

작품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아픈 경험이 있는 그다. 청년시절, 그리고 또 몇십년이 흐른 뒤 다시 한차례 수십점에 이르는 작품을 잃고 말았다. 미국 하와이 한인회 초대전에 걸었던 대작들을 이번 전시에서 내보이지 못하는 아쉬움이 또 한켠에 있다.

후배들이 작품을 모으는 사이 화백은 부지런히 그려나갔다. 이번 전시에서 내보이는 120호짜리 작품 '희망의 아침'이 그중 하나다. "내 병은 통증이 수반되는 것은 아니고 다만 계속 움직여주어야 해. 대작을 그린 것도 그 이유예요. 걸어다니면서 그리기 위해서지."

그런데 완성한 그림이 영 성에 안찬다. "힘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네요. 붓질을 더해야 함에도 힘이 부쳐 마무리를 못했어요. 깊이가 덜한 것이 아쉽군요."

#. 작품을 잃다.
작품을 잃어버렸던 이야기를 꺼낸다.

어려서 부친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관서일불학관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20대중반 일본에서 귀국후 첫 발령지가 평택고등학교다.

한국말도 서툴러 제자들에게 말을 배웠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만은 뜨거운 그였다. 당시부터 이미 유명세를 치렀다. 군·관계 인사들이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해왔다. 미군사령관 초상화도 그중 하나다. 그덕에 물감 걱정은 안하고 살았다. 사례로 물감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많은 작품을 완성했다. "이 시기가 내 그림인생의 전성기였어."

담임을 맡았는데 납부금 수납 성적이 언제나 꼴찌였다. 정이 많은 교사는 아이들에게 수납을 강요하지 못했다. 어느날 전교생을 모아놓고 제안을 한다.

"'아버지 주머니만 바라보지 말고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나를 따라라' 하고 선동을 했어요. 그리곤 집에 양계장을 차려서 병아리 500마리를 샀지요. 그런데 그만 일이 터진거야. "

잠결에 들려오는 병아리 소리가 요란했다. 눈을 떠보니 양계장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순식간 집으로 옮겨붙었다. 그림을 꺼낼 생각도 못했다. 태어난 지 1주일 갓넘은 막내와 3살된 아들을 불구덩이에서 구해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림을 말그대로 깡그리 다 태웠지." 회상 끝에 아픔이 묻어난다.

평택에서 15년간 교사생활을 접고 온 곳이 인천이다. 인중·제고 미술교사 자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는 어느덧 마흔을 넘어서고 있었다.

특별히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저 그림에 관한 한 열성으로 할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천화단에서 그의 역할이 커져갔다. 인천미협 지부장, 예총 부지부장 자리가 맡겨졌다. 더불어 한켠으론 혼이 깃든 작품이 쌓여갔다.

아픔을 한차례 더 겪는다. 그 세월동안 완성한 작품 중 상당수를 상실해버린다.

전남 완도가 고향인 작가는 그곳을 위해 헌신하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 한켠에 지니고 살았다. 완도군에서 전시실이 있는 회관을 준공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작품을 기증하겠다고 했지요. 회관이 준공됐을 때 40여점을 걸어주고 왔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났다. 얼마후 찾아가보니 작품에 온통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부실공사였던 것이다. 부랴부랴 군에서는 다른 곳으로 그림을 옮긴다 나섰으나 그 과정에 이번엔 볕에 말린다고 내놓아 아예 작품을 망가뜨리고 말았다. "그림의 상극인 물과 햇볕에 노출시켰으니 남아날 수가 없지."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리곤 얼마후 쓰러지고 만다.

#. "미술관에 작품걸어야"
화집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린다. 현재 있는 만큼 그대로 담을 수 있는 화집이다. "작품을 잃어버릴 염려를 이제 놓을 수 있을 것 같군."

인천에 살고 있는 화가로서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아쉬운 마음 한조각을 꺼낸다.

"그림을 가르치신 은사님이 일본인이지요. 일본 정부로부터 직접 뒷바라지를 받는 작가였어요. 국가가 지정한 작가는 생활비는 물론이고 활동무대까지 보장을 받지. 완성된 작품은 국가가 구입을 해서 미술관에 거는 겁니다. 50년전 이야기에요. 인천에서는 작가에 대한 지원은 커녕 아직도 미술관 하나 없는 것이 현실이야."

지난해 히로시마로 초대전 다녀온 적이 있다. 그 작은 도시에 미술관이 무려 17개였다. "미술관마다 온통 작가들로부터 구입한 그림들이 가득 채워져 있더군." 부러움을 안고 돌아왔다고 말한다.

"인천에 좋은 화가가 상당히 많아요. 그들의 작품을 보존할 수 있는 미술관을 이제는 만들어야 하지 않을 까 싶어."

마무리는 그림이야기다. "마지막 전시가 한번은 더 남았어요. 미수전이 되지 않겠나. 붓을 놓아서는 안되겠지. 계속 잡으려 해요."

/김경수기자 kks@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