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수어지교, 죽어서도 변함이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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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출병은 결코 유장의 근거지를 탈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친족인 그의 요청을 받아 그를 보호하기 위해 나서는 것입니다."
제갈량의 유중대책을 받아들인 유비는 진작부터 익주를 차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민심과 후덕함을 우선시하는 유비는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려야 했다. 특히 익주를 다스리는 유장은 한황실의 종친이기에 더없이 신중해야 했다. 그러던 차, 유비는 유장으로부터 장로를 공략해 달라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는다. 형주를 분할하고 익주침공의 기회를 엿보던 손권은 유비의 명분론에 선수를 빼앗겼다. 214년. 결국 익주는 유비의 차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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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가 성도에 입성한 지 50년이 지난 263년, 촉한은 위나라의 공격에 항복했다. 후주가 초주의 의견을 받아들이자 그의 다섯째 아들인 북지왕 유심이 반대했다. 그러나 후주는 듣지 않았다. 유심은 할아버지인 유비의 사당에서 통곡한 후, 부인과 세 아들을 죽이고 자결했다. 유비가 일평생 한황실의 부흥을 기치로 각고의 노력 끝에 차지한 익주는 부친의 유지를 받들지 못한 아들 유선에 의해 목적 달성은 차지하고 당대에 멸망하는 비운을 맞이하고 말았다.
쓰촨성 청두(成都)는 고대부터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해 왔다. 오랫동안 지명의 이름이 바뀌지 않은 유일한 곳이다. 청두의 무후사를 찾았다. 제갈량을 기념하는 무후사 정문에는 한소열묘(漢昭列廟)라고 쓴 액자가 있다. 어째서 무후사에 유비의 릉이 있는 것일까. 이곳은 원래 유비의 무덤인 혜릉이 있었다. 그런데 제갈량이 죽은 지 70년이 지난 304년, 혜릉의 가까운 곳에 무후사가 세워졌다. 명나라 때 군신의 사당이 나란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무후사를 유비 묘당의 동쪽으로 옮겼다. 명나라 말기에 불타서 없어지자, 청 강희 때 무후사와 유비의 묘당을 다시 지어 앞에는 유비를, 뒤에는 제갈량을 모셨다. 중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유비보다는 제갈량을 더욱 기억한다. 그래서 주군과 신하를 동시에 모신 군신합묘(君臣合廟)이지만 이름은 '무후사'라고 부르고 있다.
유비전에 들어서자 3미터 가량의 금색 유비 좌상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관대하고 후덕한 유비의 인상을 그대로 표현한 듯하다. 유비상의 왼쪽에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손자 유심의 동상이 있다. 그런데 오른쪽은 비어 있다. 이곳은 원래 아들인 유선의 동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꾸 부서져서 '거들어 일으켜도 안 되는 아두'라는 말처럼 다시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역사의 교훈을 깨우쳐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리라.
유심을 칭찬하는 대련을 보며 옆방으로 가니 촉한의 영웅들 47명이 문신과 무신으로 구분된 회랑에 진열되어 있다. 회랑을 지나며 그들의 좌상을 대하노라니 1천 8백 년 전 영웅들과 마주 앉은 듯하다.
유비전을 돌아가니 '명수우주(名垂宇宙)'라는 액자가 걸린 공명전이다. 전각 안에는 윤건을 쓰고 깃털부채를 들고 있는 금빛 찬연한 공명상이 보인다. 촉나라의 승상으로서 탁월한 정치력을 보인 제갈량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있다. 좌우로는 목숨으로 제갈량의 유지를 지킨 제갈첨과 제갈상의 동상이 있다. 3대에 이은 제갈 가문의 촉에 대한 충성은 후세인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공명전 낭하에는 이들을 칭송하는 글귀가 즐비하다. 당나라 시인인 두보도 이곳에 들러 제갈량을 칭송하는 시를 지었다.
승상의 사당을 어디에서 찾을런가?
금관성 밖 측백나무 우거졌네.
섬돌에 비낀 풀은 스스로 봄빛이요,
잎새에 꾀꼬리도 고운 소리 부질없네.
세 번 찾은 유비에게 천하계책 정해주고
두 조정을 부추기매 늙은 신하 마음이라
출전하기 전에 몸이 먼저 죽으니
후세의 영웅들도 길이 눈물 흘리노라.
무후사에는 '촉승상 제갈량 사당비'가 있다. 이는 당나라 때 명재상인 배도가 짓고, 명필가인 유공작이 썼다. 그리고 조각은 명장인 노건이 완성시켰다. 일명 삼절비라 부르며 중국 최고의 국보급 문화재로 칭송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를 숭배하고 존경하는 흔적이 도처에 널려있고 이를 보려는 발걸음이 오늘도 무후사에 가득하다. <끝> /글·사진= 인하대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삼국지연의 최고의 주인공 제갈량
진수도 이를 인정해서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한 걸출한 인재"라고 했다. 그러나 "매년 군대를 움직였으면서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은 아마 임기응변의 지략이 그의 장점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평했다. 유비가 이를 잘 알았던 것일까. 천하삼분지계의 필수과제인 익주를 공략할 때도 제갈량 대신 법정과 방통이 참여했다. 유비가 삼고초려하고 '수어지교'라며 제갈량을 떠받든 것과 비교하면 왠지 어색하다. 청나라 왕부지는 "공명에 대한 유비의 신뢰는 관우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유비는 적벽대전 이후 형주를 차지했을 때나, 익주를 차지하고 나서도 제갈량에게 부세조달과 군비의 충실에만 전념토록 했다. 고조 유방의 승상이었던 소하의 일을 맡긴 것이었다. 소하는 실무형 경제 관료였다. 유비 역시 공명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공명은 유비의 생각을 정확히 읽고 충실히 보필했다.
유비는 제갈량과 16년간을 동고동락했다. 하지만 이때는 수어지교의 관계가 아니었다.
진정한 수어지교는 유비가 임종을 앞두고 공명에게 유언을 내리면서부터다. 유비는 자신의 사후 촉한의 운영을 공명에게 맡겼고 공명은 이를 간파하여 익주파와 동주파를 제치고 국정을 이끌었다. 16년간 쌓아온 눈빛과 손짓으로 둘은 영원한 수어지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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