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천하는 누구의 것인가 - 9. 큰 별이 떠난 자리에 바람만 거세
"신이 명령을 받아 한중에 주둔한 지 벌써 6년이 되었습니다. 신은 어리석고 무능하며 열병이 겹쳐 계획한 일을 수행할 수 없어 조석으로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현재 위는 아홉 주를 차지하여 세력을 뻗히고 있어 제거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만일 동쪽과 서쪽이 힘을 합쳐 앞뒤로 호응한다면 설령 뜻대로 신속하게 얻을 수는 없을지라도 잠시 영토를 잠식하여 우선 그들의 힘을 훼손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나라와는 두세 차례 연이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전진하는 것도 후퇴하는 것도 어려워 실로 침식을 잊게 합니다. 양주점령이 우선되어야 하므로 응당 강유를 양주자사로 임명해야만 합니다. 만일 강유가 출정하여 하우(河右)를 제압한다면 신은 군대를 인솔하여 강유의 뒤에서 계속 따라야 합니다. 지금 부현은 바다와 육지가 사방으로 통해 있으니 긴급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호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동북쪽에 어떤 마비가 있다면 앞으로 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234년.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자신의 후임자로 장완과 비의를 지명했다. 장완은 제갈량이 한중에서 북벌에 매진할 때 식량과 병사를 공급하는 역할을 차질 없이 수행했다. 제갈량은 장완의 면면을 보고는 뜻이 충성과 고아함에 있으니 나와 함께 제왕의 대업을 도울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유선에게 표를 올려 자신의 사후 촉한의 운영은 장완에게 맡기도록 당부했다.

제갈량의 죽음은 촉으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일개 방랑의 유협집단이 체제를 정비하여 나라를 세우게 된 것은 제갈량이라는 위대한 참모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유비 사후, 국가기강과 안정을 위하여 모든 국사를 진두지휘했던 제갈량이었기에 그의 공백은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다.

장완은 근심걱정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조정을 안정시켰다. 제갈량을 잃은 슬픔도 나타내지 않았다. 장완은 제갈량처럼 스케일이 크지는 않았지만 냉정했다. 이러한 성격으로 매사를 견실하게 추진했고 그로인해 인망을 얻었다.

238년. 요동에 근거지를 둔 공손연이 반란을 일으켜 위나라가 요동으로 군사력을 집중시키자 장완은 한중으로 출병했다. 그리고 한수(漢水)와 면수(沔水)를 타고 형주 북부의 요충지인 상용(上庸)과 위흥(魏興)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계략은 제갈량의 북벌이 험한 길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완의 계획은 선박 건조가 우선되어야 만 진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촉의 수뇌부는 이를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장완은 열병에 걸려 뜻을 펴지 못하고 죽었다.

부성회관 내에 있는 부성의 연회 장면. 유비의 군사들은 유장을 살해하려 했는데 살벌한 모습이 금방
이라도 일이 벌어질 듯하다.
장완이 죽자 제갈량의 유언대로 비의가 뒤를 이었다. 비의는 기억력이 뛰어나고 머리가 비상했다. 성격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술과 도박을 좋아했다. 비의도 장완처럼 한중에 주둔했지만 명석한 판단력을 바탕으로 결코 무모한 싸움은 걸지 않았다. 힘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유가 대군을 이끌고 농서방면으로 나가 그 땅을 빼앗겠다고 하자,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승상조차도 중원 땅을 평정하지 못했거늘, 하물며 우리가 어찌 그 일을 해낼 수 있겠소"하며 타일렀다. 또한 비의는 사사건건 충돌하던 위연과 양의 사이에서 내부가 분열되지 않도록 조정했다. 입이 거친 손권조차도 기울어가는 촉나라를 떠받칠 중신은 비의라고 칭찬했다. 이러한 비의도 결국 술을 좋아한 것이 화근이 되어 253년 연회에서 만취했을 때, 위나라에서 귀순해온 곽순의 칼에 찔려 죽는 운명이 되었다. 제갈량의 유언에 따라 근근이 나라를 지탱해오던 촉한도 서서히 그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장완이 머무르며 위나라를 공략하려고 했던 부성은 지금의 쓰촨성(四川省) 멘양(綿陽)이다. 옛사람들은 이곳을 일컬어 '촉도(蜀道)의 목구멍'이라고 했다. 멘양에는 면주 제일의 산이라는 부락산(富樂山)이 있다. 이 산의 이름은 원래 동산(東山)이었다. 이곳은 유장이 유비의 힘을 빌려 장노를 토벌하기 위해 유비를 맞이한 곳이다, 유비는 유장이 베풀어준 성대한 주연에 놀라, "얼마나 풍성한가, 오늘의 즐거움"이라며 감탄했다. 유비가 익주를 탈취하고 소원을 이루게 되자 당나라 때 이 고사를 기념하여 동산을 부락산이라고 개칭하고 부락사를 세웠다. 부성회관을 들어서니 홍문의 회를 본뜬 '부성의 회'를 재현한 동상들이 늘어서 있다. 검을 숨기고 있는 위연과 유비의 군사들이 사뭇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연꽃이 흐드러진 부락산 공원의 볼거리는 무엇보다도 촉나라의 오호대장이다. 관우, 장비, 마초, 황충, 조운 다섯 장군이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 장쾌하기만 하다.

쓰촨성 멘양의 부락산에 있는 장공후사 전경. 장완은 계파간의 갈등을 조정하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촉한의 운명은 단축될 수밖에 없었다.
장완의 묘는 서산(西山)의 산등성이에 있었다. 풀 속 산길의 계단을 올라가니 팔각형으로 쌓아놓은 아담한 묘가 보인다. 더위를 식힐 겸 잠시 그의 묘 앞에 머물렀다. 흔들림조차 없는 풀잎이 다소곳한 장완의 묘를 내려다보고 있다. 장완은 도량이 넓고 솔직하며 조용한 인품이었다. 이러한 그의 성품은 공명이 북벌에 전념할 수 있도록 말없이 홀로 견마지로를 다했다. 공명은 이러한 장완에게 끝없는 신뢰를 보냈다. 하지만 장완은 부드러울 뿐 카리스마가 없었다. 부드러운 리더십은 비상시 정국을 이끌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장완이 내놓은 상용기습계책이 수뇌부의 동의를 얻지 못한 것도 그의 성격을 간파한 목소리 큰 익주출신 신하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아니 이미 국가를 위해 싸울 의향이 없는 촉에서 장완은 끝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반추해야만 했다.

제갈량의 유지를 받들지 못함과 제갈량을 그리는 마음이 온 가슴을 파헤쳤으리라. 그의 묘는 무더위 속에서도 여전히 품위를 잃지 않고 냉정하다. 제갈량보다 못하다는 평가에도 의연하다. 당연함을 인정하는 그의 바른 자세가 새삼 더위를 잊게 한다.

/글·사진=허우범 인하대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권력투쟁
 
제갈량 사후 정권다툼

서산의 산등성이에 있는 장완묘.
제갈량은 임종을 앞두고 비밀리에 군사들을 철수시키는 방안을 마련했다. 대사를 양의에게 맡기고 군사기밀은 강유에게 전수했다. 위연에게는 뒤에서 위의 사마의를 막도록 했다. 양의와 사이가 안 좋은 위연이 반기를 들었다. 제갈량의 우려가 적중했다. 위연은 제갈량이 죽기 전 은밀히 불러 계획을 일러준 마대의 손에 죽었다. 위연과 양의의 관계는 물과 기름이었다. 둘은 만나면 항상 말다툼을 벌였고, 도가 지나치면 위연이 칼을 뽑아 양의를 겨누곤 했다. 양의는 너무 분해 눈물을 흘렸다. 오직 비의만이 이 둘을 화해시킬 수 있었다.

양의는 앙숙이던 위연을 제거하자 제갈량의 뒤를 이은 장완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다. 자신보다 공이 낮은 장완이 대임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지난날 승상이 돌아가셨을 때 내가 만약 전군을 이끌고 위에 투항했다고 해도 정녕 이렇게 적막하겠소?" 이 말로 양의는 파면되어 평민이 되었다. 그리고 위연이 죽은 지 1년 반 만에 양의도 자살했다.

유비가 세운 촉한 정권은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유비의 수족과도 같은 핵심세력인 형주파, 촉땅 본토에서 세력을 키운 익주파, 그리고 유장이 다스리는 익주에 몸을 의탁한 세력인 동주파가 있었다. 이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세력 쌓기에 분주했다. 하지만 정권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형주파였다. 이에 익주와 동주파의 불만이 심했다. 제갈량은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이들 세력 간의 균형을 꾀하고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애썼다. 이를 위해서는 객관적인 원칙이 필요했다. 제갈량은 법을 엄격히 하고 이에 따라 나라를 다스렸다.

제갈량이 유비탁고를 같이 했던 이엄을 파직한 것이나 가정전투의 패배를 이유로 마속을 죽인 것도 이러한 신구의 모순을 해결하고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 표명이었다. 그러나 이는 제갈량이 솔선수범하며 공평무사하게 나라를 다스린 까닭에 잠시 평온했던 것일 뿐이었다. 제갈량이 죽자 그의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권력투쟁이 시작되었고, 그 주인공이 바로 위연과 양의였다. 제갈량이 다스린 촉한은 정치나 법률 등 제도가 탄탄했다. 지형적으로도 국가보존을 위한 수비에 유리했다. 하지만 촉한이 삼국 중 제일 먼저 멸망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각기 모순된 세력들의 내부분쟁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국가만의 일이 아닐 터이고, 어제 오늘의 일만도 아닌 것이다. 자신을 낮출 줄 모르는 인간이기 때문에 되풀이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