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천하는 누구의 것인가
한중에 있는 강태공 조어대(釣魚臺). 강태공이 낚시를 하며 때를 기다렸다는 이곳은 제갈량이 1차 북벌을 시도할 때, 조운과 등지가 제갈량의 전략에 따라 군사들을 대기시킨 곳이다.
제갈량이 철저히 준비하고 시작한 북벌은 마속이 가정을 잃음으로 엄청난 타격을 가져왔다.

모종강도 마속의 실가정(失街亭)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가정의 실패 때문에 공명은 물러갈 곳도 없게 되었다. 남안은 포기하게 되고, 안정은 버리게 되었으며, 천수는 넘기게 된다. 그리고 기곡의 군사들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서성의 군량은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후무를 사로잡고, 최량의 목을 베고, 양릉을 죽이고, 상규를 취하고, 기현을 습격한 공은 허사로 돌아가게 되었다. 애석한 일이로구나!"

마속의 실수는 제갈량이 북벌에서 거둔 혁혁한 전과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렸다. 법치주의 원칙을 내세운 제갈량은 마속을 어떤 식으로든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완이 마속의 처벌을 반대했다. 전쟁 중에 장군을 처형하는 것은 적에게 이로움만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재 또한 부족한 촉나라에서 마속과 같은 인걸을 처단한 것이 위나라를 이길 수 없었던 원인이라고 했다. 장완은 제갈량의 심복이다. 습착치 또한 촉한정통론자이다. 이러한 두 사람이 마속의 처형을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마속을 처형해야만 했던 제갈량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가정을 수비함에 있어 마속보다 뛰어난 장수들이 있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반대를 무릅쓰고

마속을 기용했다. 그리고 마속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가정을 잃었다. 이는 유비 사후, 촉나라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제갈량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었다. 또한, 이때까지 제갈량에 밀려 기회를 엿보던 반대파들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했다.

제갈량 역시 마속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공평무사한 법 집행을 중시한 제갈량이 마속의 죄를 가볍게 묻는다면 촉나라를 세우는데 참가한 익주그룹이나 인재 배치에 반대했던 자들로부터의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갈량은 눈물을 뿌리며 마속을 처형하여 촉나라의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도 제갈량 생전에만 유지되었다.


간쑤성 톈수이시 롱성진에 있는 가정 고전장터 유지
7. 눈물을 뿌리며 마속을 베다

"신은 불행히도 평범한 재능으로 맡지 말아야 할 중요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친히 삼군을 거느리는 지위를 가졌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규칙과 규범을 엄하고 명확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가정에서 장군들이 소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기곡 수비군 역시 지시를 듣지 않았습니다. 모두 신이 사람을 잘못 기용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사람을 보는 눈이 밝지 못하고, 계획을 세우고 처리하는데 어두운 점이 많았습니다. 전쟁에서 패전하면 반드시 최고 책임자를 문책하는 것이 춘추대의인 것입니다. 신의 직책이 그에 해당하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3등급의 강등을 청하오니 그 죄를 꾸짖어 주소서."

227년. 남정을 끝내고 철저한 준비를 마친 제갈량은 드디어 북벌을 시작했다. 출정을 앞둔 제갈량은 심사숙고했다. 그리고 조운을 연로하다는 이유로 북벌 명단에서 제외시켰다. 조운은 불같이 항의했다. 조운을 제외할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제갈량은 그를 선봉장으로 삼았다. 촉나라의 국운이 걸린 전투에서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는 것은 이후의 북벌추진과 군사의 사기증진에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제갈량은 조운이 적임자임을 알았으나 다시 한 번 경각심을 일깨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또한 혈기 넘치는 젊은 장수들에게도 노장의 투혼을 보여줌으로서 스스로가 더욱 분발할 수 있도록 이중의 효과를 노린 전략이기도 했다. 조운은 '상산의 조자룡'답게 위나라 장수 다섯 명을 물리치며 초반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이에 위연은 장안으로 이르는 최단 노선인 자오곡으로 군사를 몰아 기습작전으로 승부를 내자고 진언했지만 제갈량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갈량은 보다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위연은 자신의 계략을 반대하는 제갈량을 이해하지 못했다. 제갈량은 한중에서 서북으로 우회하여 남안, 천수, 안정을 공략했다.

위나라 총대장인 하후무를 생포하는 전과도 올렸다. 또한 하후무를 이용하여 무예실력 뿐 아니라 전략에도 능한 강유를 얻었다. 제갈량이 '한 마리의 봉황'을 얻은 것에 비유한 강유는 이후 제갈량의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촉의 핵심이 되었고, 제갈량의 사후에는 촉의 군사책임자가 된다.

제갈량은 남안, 천수, 안정 세 개의 군을 점령한 후, 위풍당당하게 군사를 이끌고 기산을 향하여 위수의 서쪽까지 진군했다.

위나라의 조비가 긴장했다. 유비 사후 힘을 잃고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촉이었기에 위의 조비는 걱정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전선에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던 제갈량이 대군을 이끌고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북벌을 단행하여 중요지역을 점령한 것이다. 조비는 조진과 왕랑으로 하여금 제갈량에 맞서게 했다. 그러나 결과는 위나라의 연패였다. 급기야 제갈량의 '반간지계'로 실각했던 사마의가 다시 등용되었다.

뛰어난 전략가인 사마의의 등용은 제갈량의 북벌을 힘들게 만들었다. 이는 군사적 거점인 가정의 수비를 맡은 마속이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고 식수 확보가 어려운 산 위에 진영을 구축하여 사마의 군대에 대패하면서 수세에 몰렸다.

요충지 가정을 잃고 치명타를 입은 제갈량은 즉시 전군에 철수명령을 내린다. 제갈량은 15만의 군사로 추적하는 사마의의 군대에 대항하여 홀로 거문고를 뜯는 공성계(空城計)로 사마의의 군대를 물리치며 위기를 극복한다.

마속은 병법에는 밝았지만 실전 경험이 없었다. 게다가 승상인 제갈량의 절대적 신임에 자만했다. 이는 부하 장수의 조언도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하게 하는 결과를 빚었다.

위나라가 무방비 상태에서 결행된 제갈량의 1차 북벌은 촉의 부흥을 가져올 최고의 기막힌 전략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믿었던 마속의 패배로 제갈량의 북벌은 치명타를 입게 되고 이후 5번에 걸친 북벌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제갈량은 마속에게 죄를 물어 참수형에 처했다. 아울러 자신에게도 책임을 물어 3등급 강등을 자청했다.

제갈량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며 마속을 처형했다. 자신의 오른팔을 자르는 아픔에 울었고, '마속은 허풍이 심하니 크게 써서는 아니 된다'는 유비의 예지에 울었고, 이를 되새기지 못한 자신의 회한에 울었다.

가정을 못 지킨 죄 가볍지 아니하니
마속은 실속 없이 병법만 논했구나.
원문서 목 베며 엄한 군법 보이더니
눈물을 훔치며 선제의 말 생각하네.

기산에 있는 무후사 정문. 무후사 안의 정전에는 2미터 가량의 제
갈량 소상이 있고, 뒤편으로는 관우의 소상이 있다.
'하늘의 강이 물을 따른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톈수이(天水)는 간쑤성(甘肅省)의 소강남으로 불린다. 톈수이에서 남서쪽으로 71㎞ 떨어진 곳에 유명한 기산(祁山)이 있다. 지금은 기산보(祁山堡)라고 한다. 기산보는 들판 한가운데를 흐르는 서한수(西漢水)를 따라 이어지는 커다란 길인데 좌우로는 산들이 줄지어 서있다. 이곳은 삼국시대 교통의 요지였다.

공명이 우선적으로 이곳을 점령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기산보에는 공명이 지령을 내리던 점장대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정상에는 후세인들이 공명을 기념하여 무후사를 세워놓았다. 정전 중앙에는 공명의 석고상이 있고 뒤쪽 건물에는 관우의 석고상이 있다.

마속이 패배하여 빼앗긴 지에팅(街亭)은 어디일까. 간쑤성 톈수이시 진안현의 롱성진(朧城鎭) 일대가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롱성진은 진안 현성에서 북동쪽으로 55㎞ 떨어진 청수하(淸水河)가 만든 폭넓은 계곡에 있다.

옛날의 롱성은 장안에서 천수로 통하는 요충지인 까닭에 촉과 위가 이곳을 놓고 싸울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지금의 롱성진은 옛 모습이 남아 있지 않지만, 성벽의 흔적은 남아있다.

그리고 부근에는 커다란 우물도 있다. 마속은 이 우물을 고려하지 않은 채 '높은 곳에 있어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파죽지세와 같다'는 병법서의 말만 믿고 산 위에 진을 쳤다. 아무리 뛰어난 이론이라 해도 그것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면 탁상공론일 뿐이라는 사실을 마속이 절실하게 알려주고 있다.

/글·사진= 인하대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