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치섬(작약도)
맑은 겨울 아침이다. 월미도선착장에 선다. 섬 하나가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품 안에 쏙 들어올 것처럼 아담하다. '작약도'의 원 이름은 '물치섬'이었다. 통통배를 타고 10분 만에 닿은 섬은 역시 한 아름에 들어올 것만큼 작다. 섬엔 사람이 살지 않는다. 물치섬엔 오직 '길'과 '나무'만 존재한다. 길은 두 갈래다. 산으로 오르는 길, 섬테두리로 나 있는 도로.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푸른 겨울바다 위에 놓인 경인에너지에서 짙은 하얀질감의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저 연기는 공단도시 인천의 상징이었다.

모퉁이를 돌자 영종도가 긴 뱀처럼 누워 있다. 얼굴에 얼음을 댄 것 같은 찬 기가 느껴진다. 강화해협의 억센 조류를 치받는다 해서 붙여진 '물치섬' 답게 겨울바람이 보통 사나운 게 아니다. 산책로에 접어들자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하다. 푸른 겨울하늘이 안 보일 정도라니. 자연이나 사람이나 속을 봐야 진가를 아는 법이다.
겉에서 봤을 때 순한 막내녀석 같던 물치섬의 속은 깊고 울창한 숲이다. 길도 여러 갈래로 나 있다. 게다가 공연장, 놀이동산까지…. 하얗게 솟은 탑. '무치섬등대'가 제법 우람하게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정상 한 켠에 놓은 벤치 하나. 하얀 겨울햇살을 입고 있어서일까. 벤치는 외롭지 않아 보인다. 벤치 앞에 나무가 우거져 있지 않다면 푸른 바다가 환하게 펼쳐져 있을 것이었다.

벤치의 뒷모습이 영화 <쉬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온 그 벤치처럼 보인다. 천천히 벤치에 몸을 댄다. 영화 같은 인생, 삶과 같은 예술이 머리와 가슴을 건드린다. 슬픈 영화가 아름답다면 슬픈 인생도 아름다운 것이다. 박이 터지듯, 인생에서 행복이 터지지 않는다 한들 어떠하리. 고요한 호수처럼, 아무 일 없다는 것 자체가 행복인 것을.

벤치에서 몸을 떼 다시 길을 간다. 군데 군데 녹 슨 철문. 자유당 시절 이기붕의 별장이다. 별장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초라한, 달동네 판자집 같은 외관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소파, 욕조 등이 어즈럽게 널부러져 있다. 이, 별장 아닌 별장은 한보그룹 최고 총수의 형이 이용한 장소이기도 하다.

IMF 전 까지만 해도 물치섬 즉, 작약도는 연간 30만~40만 명이 찾는 시끌벅적한 장소였다. 섬이 들썩들썩할 정도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즐거워 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고 했던가. 2007년 겨울, 물치섬을 찾는 관광객은 과거 10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물치섬으로 밀려오는 파도처럼, 물치섬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인천을 온통 품에 안은 기쁨이 몰려온다.
 
<관련기사 20면>

/글·사진=김진국기자 (블로그)freebi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