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리포트
나는 '오데사'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흑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항구다. 오데사는 흑해 북쪽 연안에 있는 항만도시이며 옛날에는 대공업도시였으나 '구 소련'으로부터 분리 독립 후 쇠퇴하였다. 오데사에서 루마니아, 불가리아,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로 정기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아침에 오데사의 호텔을 떠나고 해안의 조선소와 공장지대였던 곳을 지나갔다. 도로변의 공장은 모두 문을 닫고, 노후 된 스팀파이프, 에어파이프, 가스파이프의 보온재가 벗겨져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것이 스산하게 보인다.

마치 폐허를 지나가고 있는 느낌이다. 지난 7월 24일 저녁과 25일 아침에 키예프에서 오데사로 오는 철도변의 공장들도 이와 비슷한 광경이었다. 모든 철재구조물은 모두 붉게 녹이 쓸어 있었으며 더욱 놀란 것은 고압선의 철탑마저 녹이 쓸어 있다.


몰도바 공화국의 수도 키시네프 거리모습.

2007년 7월 26일 (목, 제5일)
오데사는 투르크와 전쟁결과 1791년, 러시아령이 되었다. 그 후 1795년에는 오데사로 불리게 되었으며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19세기 말까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이은 러시아 제2의 무역항(소맥 수출)이었다. 옛날부터 국제무역도시로 번영하여 거리에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아침 7시 기온은 20℃이며 좋은 날씨다. 오늘은 국경을 넘어 몰도바공화국의 수도, 키시네프(Kishinev)로 가려고 한다. 다행히 몰도바의 버스가 우리 호텔 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짐을 질질 끌면서 국경을 넘어가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오데사를 떠나고 왕복 2차선의 길 양쪽은 끝없는 평야가 펼쳐지며 추수가 끝난 밭이 이어지고, 가끔 옥수수와 해바라기 밭이 나타난다.

오전 9시 20분, 우크라이나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도착했다. 우리들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관리관이 버스에 올라와서 여권을 거두어 갔다. 그리고 17분 만에 통과했다. 조금 떨어져 있는 몰도바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도착해서 같은 방법으로 수속을 마치고 입국했다. 두 나라 국경을 통과하는데 걸린 시간은 1시간 50분이며 짐 검사도 없었다. 국경을 떠난 후에도 왕복 2차선도로 양쪽에는 포도밭과 옥수수 밭이 이어진다.

키시네프의 호텔, VILA VERDE에는 오후 1시 40분에 도착했다. 호텔주변의 건물은 모두 새로 지은 것 같이 깨끗하여 신도시에 온 느낌이다. 점심식사를 끝내고 호텔을 떠난 오후 3시경의 기온은 놀랍게도 25℃이다 어제의 오데사의 기온과는 10℃나 차가 있다. 불과 20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오늘 아침 북쪽에서 한랭기류가 밀려와서 서늘해졌다고 한다.

키시네프는 현지발음으로는 '키시너우'로 들린다. 키시네프라는 말은 터키어로 [양들이 무리지어 있는 곳]이라고 뜻한다는 설, 샘을 뜻한다는 설, 또 [수도원의 마을]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다. 키시네프는 옛날에 유태인과 '로마'인(집시)의 도시였다.

먼저 푸슈킨 박물관에 들렸다. 이곳은 푸슈킨(Aleksandr S. Pushkin, 1799∼1837)이 러시아문학사상 최초의 리얼리즘작품인《예프게니 오네긴》을 쓴 집이다. 내가 북한에서 학생시절 푸슈킨의 시집을 들고 다니면서 읊던 생각을 상기하면서 둘러보았다. 안에는 많은 사진과 자료들이 보존되어 있다. 푸슈킨은 1820년 9월~1823년 5월까지 유형된 상태로 이 집에서 살았다. 푸슈킨은 키시네프를 [음란의 도시]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키시네프는 전쟁으로 타버리고 지금은 바둑판같은 전형적인 구 소련식 도시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나무가 많고 깨끗한 인상을 주는 아름다운 도시다.

퓨슈킨의 동상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고, 독일에 괴테가 있다면 러시아에는 푸슈킨이 있다는 정도로 그는 전 러시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러시아의 국민시인이다. 귀족들의 질시와 모함에 시달리던 푸슈킨은 1837년 1월 26일,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전세방의 문을 나가 자신의 아내와 염문설이 파다한 프랑스 공작의 아들, 와 명예를 건 결투를 신청한다. 그러나 그는 이 권총결투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쓰러진 뒤 3일 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나이 불과 38세였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국립민족역사박물관으로 갔다. 이 박물관은 자연사박물관과 민속박물관을 합친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박물관직원의 열성적인 설명에 감동했다. 커다란 공룡의 화석도 전시되어 있었다.

'승리의 문'에서 차를 내렸다. 바로 남쪽에 시청청사가 있고 북쪽의 가까운 곳에 키시네프 대성당이 있다. 오늘 여러 곳에서 구걸하는 여인들을 보았다. 대성당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젊은 여인이 아이를 안고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다. 못 본체 하고 지나가려고 하니 앞을 가로막고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고선우 선생이 돈을 조금 주었는데 더 달라고 하면서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지하철 계단에서 구걸하는 사람이 있는데, 외국인들에게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키시네프 대성당을 떠나고 저녁식사를 할 식당으로 가는 도중에 현지가이드(20대, 여)는 근무시간이 끝났다면서 우리들을 그냥 둔 채 차에서 내려버렸다. 이 때 겨우 오후 6시 10분이었다. 우리나라 가이드 같으면 늦어도 우리들을 호텔까지 데려다 주었을 것이다. 공산주의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