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난공불락의 고구려 城郭, 페르시아에서 그 원류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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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고구려 성곽의 축조기법 가운데 돌을 다듬는 석축술은 일찍부터 돌을 사용하여 무덤을 쌓았던 적석총(積石塚)에서 유래하였고, 치와 성가퀴 그리고 옹성의 성벽 기법은 중국 등 주변 지역에서 그 기원을 찾아 볼 수 없는 고유의 성곽 축조기술로 설명하여 왔다.
물론 이러한 학설은 주로 북한학계와 국내의 일부 학자들에게서 지속적으로 지적된 것이지만,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우리 학계도 특별한 연구 없이 수긍을 하면서, 대중에게는 고구려의 강력한 군사력을 대표하는 상식으로 자리 잡아 왔다. 그러나 석축 성벽에 성가퀴와 치, 그리고 옹성을 두른 독특한 성벽 시설을 고구려가 자체적으로 개발하였다는 견해를 따르기에는 설명해야 할 문제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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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우리 취재단은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의 고대 성곽을 답사하면서, 성벽을 쌓은 재료만 흙과 돌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치와 성가퀴, 옹성의 성벽기술, 특히 평지성과 배후 산성이라는 고구려 특유의 도성방어 체계를 중앙아시아의 소그드(sogd) 성벽에서 확인하였다. 아랄해 동남부인 카라칼팍스탄 자치주에 남아있는 아야스 칼라(Ayoz Kala)는 기원 2~4세기 유적으로 평지 도성과 배후 산성을 세트(set)로 하는 도성 방어 체계와, 성벽에 정연한 치를 두고, 고구려 국내성과 동일한 옹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치의 시설은 아야스칼라를 비롯한 아랄해 동남부의 여러 성곽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치의 초기 형태를 기원 전후 파르티아(Parthia)의 수도였던 투르크메니스탄 아쉬하바드 인근의 리사(Nisa)의 성벽과, 우즈벡 남부 옛 박트리아 지역인 테르미즈의 캄피르 테파에서도 쉽사리 찾아 볼 수 있었다.
7월27일 비샤푸르를 떠나 서북쪽 메소포타미아의 평원으로 향하는 수사(Susa)의 도성에서 또 한번 고구려 석축 성벽으로 착각할 석축을 확인한 취재단은 인근의 초가잔빌의 현존 최대하는 슈메르의 성전 곧 바벨탑(지구라트 Zigurrat)의 신전을 둘러싼 성벽에서 원초 형태의 치와 옹성을 발견하였다. 지구라트로 상징되는 슈메르의 도시 유적은 인류 최초의 도시성벽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지구라트 성벽의 치는 방어시설이라기 보다는 흙으로 쌓은 벽체의 붕괴를 막기 위한 시설로 생각되는데, 여기에 성을 기어오르는 적병을 방어하기 위한 기능을 더한 것이 발전된 치의 기능이다. 고구려 성곽 중에 치가 가장 잘 남아있다고 평가되는 요양의 백암성 서북벽 내외에 모두 치가 만들어져 있는데 치의 기능과 그 기술적 계보가 서아시아에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유적이다.
이란을 비롯한 서아시아지역 가운데 건축물과 특히 도성 등 성곽에 돌을 사용한 것은 이란의 고대 유적에서 현저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앗시리아, 바빌론 등 메소포타미아 평원의 왕조나 카스피해 동족의 중앙아시아와 천산산맥 동쪽의 중국 서역지방에서 모두 흙을 이용한 벽돌(혹은 블록)을 이용한 것과 다르다. 페르시아의 여러 유적에 장대한 석축 건조물이 나타나는 것은 동시기 같은 재료를 사용하던 그리스-로마의 영향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란 고원 곳곳에 손쉽게 다듬을 수 있는 석재가 산재해 있기 때문으로 생각 된다. 특히 사산조 페르시아의 시기에는 석축이라 하여도 전대의 장대한 석재가 아니라 블록모양의 다듬은 성돌을 이용한 축조기법이 크게 유행하였다.
돌을 사용하고 성가퀴와 치, 그리고 옹성 등의 시설을 갖춘 고구려의 성벽기술이 유행하던 시기, 거의 같은 양상을 보여주는 유적은 현재 사산조 페르시아의 건축물과 성벽 밖에 없다. 일찍이 중국 성벽에 보이는 철자형(凸字形)의 성가퀴가 서아시아의 앗시리아와 페르세폴리에 원류를 두고 있으며, 이것이 기원전후 인도와 쿠차와 돈황을 거쳐 중국으로 전래되었다는 연구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 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성가퀴는 돈황의 제257호 석굴 벽화에 새겨진 것으로 5세기 후반의 북위(北魏)시대의 것이다. 고구려에는 그 보다 1세기 앞선 요동성총에 그려진 고구려 요동성의 성벽의 성가퀴이다. 중국 보다 1세기 앞섰다고 고구려에서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보기는 어려우며, 이 또한 기원전 8세기 서아시아의 앗시리아 성벽도, 그리고 2007년 7월26일 우리 취재단이 목도한 페르세폴리스의 도성에서 확인되는 凸자형의 성가퀴가 그 원류가 될 것이다.
고구려의 강력한 군사력을 상징하던 성곽을 철옹성으로 만든 견고한 방어 설비와 옹성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그것과 기술적 계보를 같이하며 동 시기 존재하던 유적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7천 킬로미터 이상 서로 떨어진 동서의 두 세력 사이의 다양한 교류의 흔적을 찾아 이를 역사적 실체로 엮어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 하겠다. 이미 우리 학계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고사리 모양의 팔메트 문양, 천정의 모를 죽여 井자 모양으로 장식한 말각조정(抹角操井), 4·5세기 사산조 페르시아가 지배하던 사마르칸트 북방에서 발견된 허리띠 장식에 새겨진 중무장한 기병과 고구려의 관련성을 지적한 바 있으며, 신라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리잔과 소뿔모양의 술잔인 각배(角杯), 신라 사찰 장식으로 유행하던 연화문 와당, 목거리를 문 두 마리의 새장식 등이 모두 사산조 페르시아에 기원을 두었다고 설명해 왔다. 이제 사산조 페르시아와 고구려 등 우리나라 삼국과의 사이에는 남북조시대라는 중국의 분열기에 이는 초원이라는 고속도로를 달리던 소그드인의 활동으로 각지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앞으로 두 지역사이의 교류가 한낱 사치품의 교환이 아니라 건축술과 갖은 기층 문화의 광범위한 교섭이 이루어진 실상을 구명해야 할 것이다. /특별취재팀
지원:지역신문발전위원회
▶성가퀴= 여장(女墻)이라고도 불린 凸자 모양의 타구
▶치(雉)= 성벽을 기어 오르는 적병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 중간 중간을 반원형 혹은 사각형 모양의 돌출 부위를 만든 것으로 마면(馬面)으로도 불림.
▶옹문(甕門)= 성곽 방어의 최대 난제인 성문을 보호하고자 성문 주위를 ㄷ자형 혹은 항아리 모양의 덧문을 쌓은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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