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장강은 변함없이 흐른다
북고산 제강정에서 바라본 장강의 모습. 멈춘 듯 흐르는 광활한 장강의 손짓은 한 여인을 열녀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국태께서는 병환이 위중하시어 조석으로 부인만 찾고 계시옵니다. 아마도 지체하시다가는 생면을 못하시게 될 것이옵니다. 오시는 길에 부인께서는 아두도 데리고 와서 한번 보여 달라고 하셨습니다.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촉으로 향했다. 손권은 이 틈을 타서 형주를 차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오국태의 따끔한 반대에 부딪쳤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누이동생을 죽이는 일이라고 꾸지람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때 최고의 충신인 장소가 묘안을 냈다.
오국태가 위독하다는 거짓 밀서를 보내 손부인으로 하여금 아두를 데려오게 하면 유비는 형주를 아두와 맞바꿀 것이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군사를 움직여 빼앗자는 것이었다. 손권은 주선으로 하여금 즉시 실행에 옮기도록 명했다.
손부인은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하다는 밀서를 보고 일곱 살 난 아두를 데리고 배에 올랐다. 유비로부터 손부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유사시 그녀의 행위에 대해 법을 엄중히 집행하여 규율을 잡도록 하라는 특별임무를 부여받은 조운이 급히 배를 막았다. 손부인이 저항하자 뒤쫓아 온 장비와 함께 아두를 빼앗아 돌아왔다. 이로써 장소의 계책은 무용지물이 됐고 자룡과 익덕은 후세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예전에는 당양에서 주인을 구했고
오늘은 장강에서 몸을 날렸네.
배 위의 오나라 병사들 놀라 자빠지니
자룡 같은 용사는 세상에 다시없네.

장판교에서는 분통이 끓어올라
범처럼 포효하여 조조 병사 물리쳤고,
오늘은 강위에서 위기의 주인 구하니
청사에 실린 이름 만고에 전해지네.

북고산 감로사에 있는 관공기념비.
관우와 관련된 유적 은 중국의 도처
에서 볼 수 있는데 이는 중국인들의
생활과도 같은 관우숭배사상을 잘 대
변해 주는것이다.
오나라로 돌아온 손부인은 편안했다. 아두 역시 친자식이 아니고 계모에 의해 키워졌기에 정도 없었다. 친정으로 돌아온 손부인은 결혼 전의 자유를 마음껏 구가하며 지냈다. 남편인 유비와의 사이도 좋지 않았으므로 잊히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다. 그러나 이렇듯 거리낌 없던 손부인이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참패하고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비통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다가 급기야는 눈물을 흘리며 장강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손부인의 행동거지와는 다르게 그녀의 속마음은 유비를 사랑했던가. 분명코 그것은 아닐 것이다. 한때 부부의 인연을 맺은 관계이었기에 안됐다는 생각은 들었을망정 목숨까지 버릴 정도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도 사실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나관중이 유비를 향한 손부인의 비극적이고 감동적인 사랑이야기로 꾸며내어 손부인을 열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유비는 좋아할지언정 손부인은 정녕코 칼을 휘둘렸을 것이다.

북고산의 감로사를 돌아보고 정상으로 올라가니 제강정(祭江亭)이 오뚝하다. 이 정자는 유비가 전쟁에서 지고 죽자, 손부인이 장강으로 몸을 던진 곳이라고 한다. 허구의 사실화가 역사의 전면에 나선 현장에 서니 역사도 사실의 선별이 아니라 조작이 많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역사적 맥락과 행간의 사실적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북고산 입구에는 유비와 손권이 천하통일의 야망을 품고 이를 칼로 시험한 시검석(試劍石)이 있다. 이 돌은 원래 땅 속에 있었던 것인데 연못을 만들면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시검석 뒤에는 유비와 손권이 칼을 잡고 서 있는 석상이 있다. 북고산에는 오나라의 명장인 태사자와 참모인 노숙의 묘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는다. 날은 어두워지고 마음은 급해졌다.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산비탈을 담장으로 둘러친 곳이었는데 그 안에 내가 찾는 유적들이 있었다. 태사자는 유요의 수하로 있었는데 손책과 호각지세의 승부를 겨룬 용장이다. 유요가 손책에게 패한 후, 손책이 손수 태사자의 포승을 풀고 진심으로 대하자 이에 감동한 태사자가 흩어진 유요의 병사들을 모아서 돌아온다. 이때부터 태사자는 오나라의 명장으로서 끝까지 충성을 다했다. 태사자는 위풍이 당당하고 궁술에 뛰어났다. 서기 206년, 41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을 앞둔 태사자는 "남자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 7척의 칼을 차고 있는 것이라면, 천자의 계단이라도 올라섰어야만 했을 것을 뜻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인가"고 한탄하였다. 태사자 묘는 오랫동안 찾지 못하고 있다가 청나라 때인 1870년에 진강의 성벽을 수리하면서 발견되었다. 태사자의 묘 뒤에는 노숙의 묘가 있다.
진강(鎭江) 시내에는 옛날의 집과 상점들이 있는 거리가 있다. 그중 하나가 서진도가(西津渡街)인데 장강의 연안으로 선착장이 있었던 곳이다. 당나라 때는 금릉도(金陵渡)라고 불렀으며 이백과 맹호연이 이곳서 배를 기다리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 원나라 때에는 마르코폴로가 들어온 곳이기도 하다. '진강에 와서 옛 거리를 보지 않으면 진강에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듯이 진강의 옛 거리는 유명하다. 하지만 일정의 촉박함으로 옛 거리를 살펴보는 것은 포기해야만 했다. 특히, 19세기 영국영사관 건물을 개조하고 3만점이 넘는 문물을 소장한 채 삼국유적의 보고로 자리 잡은 진강박물관을 등 뒤에 두고 온 것이 내내 안타깝기만 하다. / 글·사진=허우범 인하대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북고산 입구에 있는 유비와 손권의 석상. 두 사람은 각자의 소원을 빌며 검을 시험했는데, 석상 앞에는 두 사람이 쪼개놨다는 시검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