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숨쉬는 인천여행 시리즈 < 39 > 부평향교
그 옛날 학동들이 매미로 환생한 걸까. 100년 전 만해도 글월을 읊던 소리가 낭랑하던 '부평향교'는 지금 늦매미소리로 웽웽거린다. 타오르는 불길 모양으로 잎이 하늘로 솟은 향나무에서도, 키 큰 은행나무에서도 '공자왈 맹자왈' 하는 것 같은 매미들의 소리가 터져 나온다. '윤회'의 빛깔이 뭍어 있는 소리다. 생각과 의식은 실존과 현상을 규정한다.
바깥 문인 '외삼문'의 동쪽으로 들어서니 '명륜당'이 눈을 부릅뜨고 객을 내려다 본다. 학생들이 공부를 하던 '서당'이다. 지금으로 치면 교실의 절반 크기도 안되는 협소한 방. 저 작은 글방이 위엄 있게 다가오는 것은 '가짜 학력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의 부끄러움 때문이리라. 명륜당은 재차 다그친다. '껍데기는 가고 알멩이만 남아라.'
조심스레 명륜당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내부 나무기둥과 천정 등이 녹색도 아니고 연두색도 아닌, 그 중간쯤 되는 색깔로 칠해져 있다. 천정 중간중간은 시간을 오래 보낸 듯한 액자 여러 개가 걸려 있다. 정중앙에 붙은 유리액자는 '환안제'이고 나머지 나무액자들은 '중수기'다. 위패의 이동이나 향교 수리가 있을 때 그 내용을 기록한 액자들이다. 한 켠엔 석전대제를 지낼 때 쓰는 모자가, 다른 한 켠엔 의복이 걸려 있다. 나무로 된 바닥은 울퉁불퉁 패여 있다. 그 것은 병자호란 뒤 숙종14년(1636) 재건한 이후 이 곳을 거쳐간 학생들 배움의 깊이다. 한일합방 이전까지 향교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 공교육 기관이었고, 부평향교에선 언제나 70명의 학생들이 선현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혔다.
명륜당 뒷쪽 마당으로 나간다. 정면으로 '내삼문'이 보이고 오른 쪽, 왼 쪽으로 각각 '동재', '서재'가 놓여 있다. 먼 곳에서 온 학생들이 머물던 기숙사다. 지금 이 곳은 부평향교 내 화장실 신축공사를 하는 인부들이 임시숙소로 사용 중이다.
내삼문을 열자 '대성전'이 드러난다. 성현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까닭에 향교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대성전에선 매년 두 차례 문묘 석전대제가 봉행된다. 대성전을 정면으로 놓고 볼 때 왼쪽, 오른 쪽의 사랑방 같은 건물은 '서무'와 '동무'다. 해방 전까지 우리 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셔뒀던 장소다. 성균관 유림들은 해방 뒤 "우리 성현들을 공자님이 계신 곳에 함께 모셔야 한다"며 위패를 대성전으로 옮겼다. 그 때까지 대성전에는 공자, 맹자, 안자, 증자, 자사자와 같은 중국 성현의 위패만 있었다.
부평향교는 짜임새 있는 건물 배치로도 유명하다. 향교에선 늘 볼 수 있는 은행나무 그늘 아래 선다. 공자가 세상의 이치와 진리를 탐구했다던 은행나무 그늘…. 늦매미소리만이 우수수 쏟아져 내린다.
<관련기사 20면>
/글·사진=김진국기자(블로그)freebi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