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의 삼국지기행 - 제3부 장강은 변함없이 흐른다
호북성 포기시 적벽산 정상에 세워진 주유상. 주유는 손권을 도와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최고의 수훈 장수다.
2 동남풍아 불어라-적벽대전(2)

저는 어릴 적부터 주유와 동창으로 매우 친하게 지냈습니다. 제가 강동으로 가서 세치 혀로 그를 달래 항복하도록 설득하겠으니 승상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제가 강동에 건너가면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조조는 적벽대전을 앞두고 탐색전에서 동오의 감녕에게 패했다. 청주와 서주군사들이 수전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조조는 장윤과 채모로 하여금 수군훈련을 시키게 하였다. 장윤과 채모는 형주사람인데 조조에게 항복한 자들로 수전에 익숙한 장수들이었다. 이들에 의해 실시되는 수군훈련은 절묘하고 깊이가 있었다. 그리고 주야를 가리지 않고 위세를 드높이고 있었다.

제갈량이 동남풍을 일으킨 배풍대.
주유가 이를 엿보고 크게 걱정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조조는 기분이 언짢았다. 탐색전의 패배로 사기가 꺾였는데 수군 영채까지 정탐을 허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조조의 막빈으로 있던 장간이 공을 세우고자 스스로 세객을 자청한다. 조조는 매우 기뻐하며 흔쾌히 수락했다.
주유도 장윤과 채모를 처치해야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동문수학한 친구 장간이 조조의 세객이 되어 오자 천재일우의 기회임을 알고 부하들에게 장간을 역이용하는 계략을 지시한다. 그리하여 장윤과 채모가 동오 쪽과 긴밀히 연결을 취하고 있는 가짜편지를 만들고 장간이 이를 훔쳐 달아나게 한다. 조조는 장간이 가져온 편지를 보고 격분하여 장윤과 채모를 죽인다. 조조는 자신이 감정에 휩싸여 처리한 일이 계략임을 알고 후회하나 모른척한다. 간웅의 전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주유는 자신의 계략대로 장윤과 채모가 처형되자 기뻤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부처님 손바닥 보듯 하고 있는 제갈량이 있었기에 걱정거리는 끊이지 않았다. 주유는 동오를 위해 제갈량 또한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조조군의 군량을 기습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제갈량을 죽이도록 하려 했으나 결국은 제갈량의 논리에 밀려 취소하고 말았다. 주유는 다시 제갈량에게 십만 개의 화살을 열흘 이내에 만들라고 하며 목숨을 옥죈다. 제갈량은 태연자약하게 사흘 안에 만들어 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안개 낀 새벽, 짚단을 쌓은 쾌속선을 타고 조조군의 영채로 가서 십만 개의 화살을 가져온다.

온 하늘 가득한 안개 장강을 뒤덮으니
거리도 알 수 없고 강과 육지도 막막하여라
소나기인 듯 메뚜기인 듯 화살이 날아드니
공명이 오늘은 주유를 굴복시켰네

연달아 당한 조조는 매우 분했다. 동오의 진영을 염탐하여 역전의 기회를 잡아야 했다. 이에 순유의 계책에 따라 채중과 채화로 하여금 거짓으로 항복하게 한다. 하지만 주유는 이들을 역으로 이용한다. 황개의 고육계(苦肉計)와 감택의 거짓 항복이 조조의 마음을 움직이고, 방통의 연환계가 조조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손유동맹의 전략은 완벽했고 준비 또한 철저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동남풍이 필요했다. 제갈량이 제단을 쌓고 바람을 불렀다. 과연 동남풍이 불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철저히 준비된 동맹군이었지만 걱정스러웠다.
이에 비해 준비 없는 조조는 자만에 빠져있었다. 전쟁에 있어서 자만은 곧 필패로 이어진다. 매사 의심이 많은 조조도 자만을 의심하지는 못했으니 패배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봉추암 아래 연못에 있는 방통정.
적벽대전이 벌어진 츠비(赤壁)는 포기(蒲圻)시에 속해 있어서 포기적벽이라고 부른다. 포기시는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서 남서쪽 140㎞지점에 있는데, 전쟁이 벌어진 적벽산은 이곳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40㎞ 떨어진 장강가에 있다. 배를 타고 적벽산을 향했다.
적벽산에 오르니 제일 먼저 적벽대전 승리의 주역인 주유의 상이 보인다. 산등성이를 일궈 만든 평지에 세워진 주유상은 커다란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갑옷과 투구로 치장한 주유의 모습이 웅장하게 조각되었다. 그러나 조각상은 장강을 향하고 있지 않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생각 없이 그냥 역사적인 자리에 세워놓은 것인가. 역사적 유적지에 만들어놓은 기념물이 그곳의 역사적 의미와 부합될 때 더욱 빛을 내는 것은 너무도 지당한 사실이다. 그러나 자세한 고증 없이 대충대충 이뤄지는 복원을 볼 때면 가슴이 아프다. 이 어찌 중국만의 일이겠는가.
남병산에는 제갈량을 모시는 무후궁(武侯宮)이 있다. 이곳은 제갈량이 제단을 쌓고 동남풍을 빈 곳이다. 그래서 배풍대(拜風臺)라고 하는데, 제갈량이 무향후(武鄕侯)라는 작위에 봉해졌기 때문에 같이 부르고 있다. 방통이 기거했다는 봉추암은 금란산 중턱에 있는데, 검은색 기와에 흰색의 건물이 천 년이 넘는 은행나무 아래 고풍스럽다. 방통사 앞에는 등나무가 있다. 방통은 이 등나무를 보고 연환계를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후세에 지어낸 이야기이다. 삼국지 유적은 중국 곳곳에 산재해있다. 하지만 모두 삼국지 시대의 유적은 아니다. 삼국지연의에 의해 후대에 만들어진 문학적 유적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칠실삼허(七實三虛)의 이야기가 만든 삼실칠허(三實七虛)의 유적지를 찾는다. 그리고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사람들은 딱딱하고 지루한 이야기보다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사실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스스로가 사실이라고 믿으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삼국지연의는 재미있고 감동을 주는 최고의 역사책이 되는 것이다. /글·사진=허우범 인하대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조조의 천하통일을 가로막은 주유
주유가 조조의 세객으로 온 장간에게 가짜편지
를 보게 하여 조조군의 수군지휘관인 장윤과
채모를 처형하게 만든 계략을 표현한 삼국지우표
장간도서(蔣幹盜書)
주유는 손책과 의리의 친구였다. 손책이 죽은 후, 주유는 솔선하여 동생인 손권을 지지하고 장소와 함께 손권의 좌우 핵심이 되었다. 또한 동오 최고의 참모인 노숙을 손권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노숙은 손권에게 전쟁에서의 득실을 솔직하게 말하고 조조를 맞이한다면 어디로 가겠느냐고 반문하여 손권으로 하여금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한다. 이는 정치적인 계산이었다. 그런데 장소로 대표되는 주화파의 정치적 논리가 만만치 않았다.
노숙은 손권에게 주유를 부르도록 하였다. 주유도 노숙과 생각이 같았기 때문이다. 주유는 강경 매파였다.
조조는 명분상 한의 재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한의 도적이다. 장군인 손권은 웅대한 재주를 갖추고 부친과 형님의 업적을 잇고 있으니 응당 해야할 일은 천하를 두루 다니며 한나라를 위하여 모든 잔재를 일소하고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주유의 이 말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으로서 전쟁에 임하는 병사들의 사기진작에도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이어서 주유는 군사적인 계산을 정확히 했다. <강표전>에 따르면 주유는 먼저 조조의 80만 대군은 긴장을 조성하기 위한 수치임을 말한다. 그리고 조조군의 병사는 북방에서 온 병사들이 15-6만 명이지만 매우 지쳐있고, 새로 편입된 유표의 부하들이 7-8만 명이지만 의심하며 관망하는 상태라고 분석한다.
이처럼 피로에 지친 병사와 의심하며 관망하는 병사들은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오합지졸일 따름이라고 분석하여 손권에게 군사적으로도 불리하지 않음을 건의하였다. 손권은 이러한 동오의 군대를 이끌고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다.
삼국지연의는 제갈량을 신출귀몰한 전략가로 만들어 놓았는데, 이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이 주유였다. 주전파의 대표인 주유를 화를 돋아 조조군에 대항하게 만들고, 손권과 관련된 초선차전(草船借箭)이야기를 동남풍을 불게 하는 이야기와 함께 제갈량의 지략으로 만들어 주유를 여지없이 농락한다. 그러나 역사는 적벽대전 승리의 최고 주역은 주유임을 숨기지 않는다.
조조군의 위세에 눌려 주화파의 항복전략으로 기울었던 분위기를 바꿔 손유동맹을 결성하고 직접 전쟁을 지휘하여 화공으로 조조군을 초토화시켰기 때문이다.
주유의 이러한 공적이 없었다면 천하는 일찍이 조조의 것이 되었을 것이고, 삼국지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