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 인정한 장료의 기백과 무예
허페이시 소요진공원 입구에 있는 장료의 동상. 팔 백의 결사대로 손권의 십 만 대군의 전의를 상실케 한 그의 용맹함은 삼국지 장수 중 여포와 관우 다음으로 칭송 받는다.
지난번 제갈근이 장사 등 3개 군을 돌려달라고 오셨는데, 군사께서 안계시는 바람에 돌려드리는데 실수가 있었사옵니다. 그래서 이제 돌려드린다는 편지를 가지고 왔사옵니다. 갖고 있는 형주의 남군과 영릉군도 본래는 돌려드리려 했으나 조조가 동천을 기습 점거하는 바람에 그리되면 관장군께서 용신할 곳이 없어지옵니다. 지금 합비는 텅 비어 있으니 군후께서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시기 바라옵니다. 조조가 군사를 철수하여 남쪽으로 돌아오고, 우리 주인이 만약 동천을 빼앗는다면 즉시 형주 전부를 돌려드릴 것이옵니다.

215년. 유비가 촉을 차지하자 손권은 또다시 형주반환을 요구했다. 유비는 형주를 관우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손권에게 반환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한중의 장로를 토벌하기 위해 출정했다. 장로는 양평관에서 조조군을 맞아 싸웠지만 패하고 말았다. 한중을 차지한 후, 사마의와 유엽은 조조에게 계속해서 촉을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후한시대를 연 광무제가 득롱망촉이라 하며 욕심을 내었던 곳을 조조는 농을 얻었는데 촉(蜀)까지 바랄 수 없다며 따르지 않았다. 걱정거리 없는 강자의 여유로움일까. 권력다지기에 들어간 조조로서 장기간의 원정을 꺼려했던 것이리라.
유비는 이제 막 촉을 점령한 지라 민심수습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조조가 한중을 차지하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손권에게 형주의 동쪽을 돌려주고 동맹관계를 회복한다. 그리고 손권에게 조조가 점거하고 있는 합비를 공격해줄 것을 요청한다. 손권은 유비의 다급한 속셈을 꿰뚫고 있었다. 손권은 손해볼 것이 없었다. 돌려달라고 해도 주지 않고 버티던 형주의 일부를 찾을 뿐 아니라, 유비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병력의 손실을 막고 위에 대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중은 멀지만 합비는 지척이었다. 합비는 조조에게 있어 강남 공격의 전초기지이기도 하였지만, 손권에게 있어서도 중원을 공격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손권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합비를 공격한다. 손권의 대군은 파죽지세로 여강태수 주광이 지키는 환성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합비를 공격한다. 합비는 백전노장의 장료가 이전, 악진 장군과 지키고 있었다. 주력군은 한중공략에 참가하였기에 병력은 7천 명뿐이었다. 조조는 한중으로 떠나며 "손권이 쳐들어오면 장료와 이전은 성을 나가 싸우고 악진은 성을 지켜라"는 명령서를 남겨두었다. 사이가 나쁜 이전과 장료는 사심을 버리고 힘을 합쳐 조조의 명령을 따른다. 팔백 명의 돌격대를 구성한 장료는 순식간에 손권의 대군 속을 휘저으며 수십 명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질풍처럼 손권이 있는 본진을 향했다. 이에 놀란 손권은 허둥대며 목숨을 지키기에 바빴다.

그날 적로가 단계를 뛰어 넘더니만
이제 손권이 합비에서 쫓기고 있네
뒤로 물러났다가 채찍질하며 말을 내달리니
소요진 위로 옥룡이 나는구나.

장료의 용맹함에 손권의 대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합비 공략을 포기해야만 했다. 장료의 팔 백명 군사가 손권의 십 만 대군을 무찌른 합비전투는 장료의 명성을 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장료는 이 전투의 공적으로 정동장군(征東將軍)에 임명되었고 죽을 때까지 오나라가 중원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안후이성(安徽省)의 성도인 허페이(合肥)는 예로부터 중원과 강남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강남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중원진출의 대문이기에 서로가 이곳을 차지하려는 쟁탈전이 자주 일어났다. 합비는 삼국고성(三國古城)이라고도 불리는데 그만큼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합비쟁탈전으로 유명한 전투는 소요진(逍遙津)이다. 소요진은 합비 옛 성의 북동쪽에 있는 강나루였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흐르며 강줄기가 변하여 지금은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소요진공원이 되었다.
합비에서의 일정은 소요진공원부터 시작했다. 공원을 들어서니 늠름한 모습으로 말을 타고 있는 장료의 동상이 제일 먼저 눈에 띤다. 이른 시각임에도 사람들이 많다. 길가 좌우의 가로수에는 춘절을 지낸 붉은 등이 줄지어 걸려있는데, 이제 본격적인 철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손권이 장료의 공격에 허겁지겁 달아난 비기교(飛騎橋)는 입구에서 십 여분 정도 올라간 곳에 있었다. 비기교를 건너니 널따란 소요호가 아침햇살에 반짝인다. 호수 가장자리에 있는 소요각(逍遙閣)은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섰고, 호수 가운데 섬까지 이어진 아치형다리 끝에 있는 소요루(逍遙樓)와 함께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소요각은 합비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해놓았는데, 특히 합비전투의 현황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꾸며놓은 전시실이 있었다. 인형 하나하나마다 동작과 표정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당시의 전투에 참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장료의 의관총이라고 전해오는 흙무덤은 공원 뒤쪽에 있었다. 중국의 무덤이 다 그렇듯이 측백나무가 우거졌다. 누군가가 다녀갔는지 향불이 고적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햇살 사이를 흐르고 있다.
소요진공원을 둘러보고 교노대(敎努臺)를 찾아 나섰다. 합비는 조조와 손권이 여러 번 싸운 곳이라 조조에 관한 유적도 제법 있는 곳이다. 교노대는 일명 명교대(明敎台)라고도 하는데 소요진의 번화가인 회하로에 있다. 이곳은 조조가 장병들을 수시로 점검하고 궁술과 석궁을 연습시켰던 장소였다. 당나라 시대에 이곳에 명교사(明敎寺)라는 절이 세워졌는데, 이로 인해 교노대도 명교대라 불리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교노대 안에 있는 커다란 범종에는 명교사라는 글씨가 부조되어 있다.
교노대 건너편에는 조조가 식수로 사용했다는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사용할 수 없어선지 아크릴판으로 덮어 놓았다. 이 우물은 옥상정(屋上井)이라고 하는데 우물의 입구가 우물 주변 집들의 지붕보다 높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합비전투의 상황을 재현해 놓은 전시실의 비기교부분. 손권이 부하들의 보호를 받으며 비기교를 건
너 달아나려 하고 있다.
합비는 조조의 투통을 낫게 한 명물요리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조조계(曹操鷄)라 이름 붙여진 이 요리는 각종 약재와 함께 병아리를 통째로 소금물에 넣고 삶아 만든다. 1985년, 합비시의 요리사들이 조조계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비법을 연구한 끝에 이 요리를 부활시켰다고 한다. 병아리를 재료로 하여 조조가 즐겨 마셨다는 중국의 명주인 고정공주(古井貢酒)와 천마, 두충, 표고, 죽순 등 18가지의 재료를 넣어 만든 조조계는 한번 먹으면 그 맛을 평생 못 잊는다고 한다. 음식문화의 체험은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독특하고 별난 맛의 음식체험을 통해 오감을 만족시키는 여행이 되기 때문이다. 구미가 당기는 조조계를 찾아 발길을 옮겼다.
/글·사진=허우범 인하대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적도 인정한 장료의 기백과 무예

교노대 안의 옥상정. 조조가식수로사용했던
우물이다.

장료는 원래 흉노와의 교역을 미끼로 흉노를 무찌르려던 섭일의 후손이었는데, 흉노의 복수를 피해 성을 바꿨다. 젊은 나이에 군의 관리가 되어 병주자사 정원의 부하로 있다가 동탁, 여포의 부하가 되었다. 장료가 여포의 부하로 있을 때 관우가 장료의 인물됨을 보고는 여포 같은 역적을 섬기는 것에 대해 무척 안타까워했다. 또한 장비가 소패에서 장료와 맞붙으려 하자 관우는 장료의 무예가 뛰어남을 알고 장비를 저지하기도 했다. 여포가 조조에게 붙잡혀 목숨을 구걸하자 장료는 대장부가 죽음도 깨끗이 맞이해야지 창피하게 구걸하는 법이 아니라고 일침을 놓는다. 조조가 여포와 함께 장료를 죽이려 하자 유비와 관우가 말렸다. 그리하여 장료는 조조의 부하가 되었다.
조조의 부하가 된 장료는 많은 공적을 쌓는다. 하후연과 함께 창희를 공격하여 귀순시키고, 원담과 원상의 토벌에 종군하며, 오환족의 답돈을 무찌른다. 조조가 유비를 서주에서 무찌르고 관우를 항복시킬 때도 장료가 나선다. 관우가 조조의 품을 떠나 다섯 관문을 통과할 때 이를 막으려드는 하후돈을 제지한 것도 장료였다. 적벽대전에서 황개에게 화살을 쏴서 조조를 구원한 자도 장료였고, 화용도에서 조조를 막은 관우에게 예전의 은혜를 상기시켜 탈출을 묵인하게 한 것도 장료였다. 장료의 공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합비전투에서 최고의 용맹을 날린다. 장료는 이전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적을 앞에 두고 일치단결함으로써 적은 수의 병력으로 손권의 대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조조의 뛰어난 용병술이 장료의 용맹함을 더욱 드높여주고 있는 것이다. 밤마다 우는 아이들에게 '장료가 왔다'고 하면 울음을 그쳤다고 하니 그의 용맹함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조비 역시 장료를 매우 아꼈는데 장료가 전선에서 병이 나자 손수 어의를 대동하고 찾아가서 치료하게 하고 식사도 함께 할 정도였다. 손권은 병중인 장료가 공격해 와도 당할 수 없음을 알고 군사들에게 조심하라고 명령했다. 장료는 주인을 많이 바꿨다. 그럼에도 그때마다 중용된 것은 그가 침착하고 냉정하며 용맹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북방 이민족의 자랑인 기마술에 뛰어난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장료의 뛰어난 기마술과 용맹함은 오나라 손권의 발목을 잡는 역할을 하였다.
조조악인론에 충실한 나관중조차도 장료만큼은 후한 점수를 주었는데, 장료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 뿐만 아니라 적국의 맹장과 주군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다. 자신의 특기를 살리고 이를 사심 없이 정도(正道)로 사용하는 자는 동서고금 누구라 할 것 없이 사랑받는 법이다.

손권이 장료의 공격에 놀라 달아난 비기교.

/글 사진=허우범 인하대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