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용쟁호투의 역사와 그 전설(9) 관우,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보정선사가 관우의 혼령을 깨닫게 하고 그의 넋을 우로하기 위해 세운 옥천사 옥천전. 수나라 시대 지어진 이 건물은 관우숭배의 총본산과도 같은 곳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장군의 큰 덕을 흠모해 왔소. 진진지호(秦晋之好:사돈지간)를 맺고 싶었는데 어째서 거절하셨소? 공은 평소 천하무적이라고 자부하더니, 오늘은 어째서 나에게 사로잡혔소이까? 장군! 오늘도 여전히 손권에게 항복하지 않으시겠소?

파란 눈의 수염 붉은 쥐새끼야! 나는 유황숙과 도원에서 결의하고 한나라를 붙잡아 세우기로 맹세했다. 어찌 너 같은 한나라의 반역자 놈과 짝이 되겠느냐? 내가 지금 간사한 계책에 잘못 빠졌으니 죽을 따름이다. 무엇하러 여러 말을 하느냐?

219년. 58살의 관우는 아들 관평과 함께 손권에 의해 참수됐다.
형주성을 잃고 맥성으로 도피하였던 관우는 필사의 탈주를 시도한다. 요화로 하여금 유봉과 맹달에게 구원을 요청하지만 두 사람은 핑계를 대며 거절한다.
병사들의 가족들이 투항을 권하자 달아나는 병사들 또한 부지기수였다. 군심은 수습할 수 없었고 군량도 바닥이 났다. 오직 죽음을 무릅쓰고 포위망을 뚫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나라군은 도주로를 철저히 차단했다. 천하의 명장 관우라도 10여명의 병사로 겹겹의 봉쇄를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조가 그랬던 것처럼 손권도 관우를 자신의 부하로 삼고 싶었다. 제갈근을 통해 귀순을 권유한다. 형주는 물론 부귀영화도 보장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관우는 "옥은 깨뜨릴지라도 그 흰 빛을 잃게 할 수는 없고, 대나무는 불에 태울지라도 그 절개를 꺾을 수는 없는 법이오." 라며 죽음도 두려워않는다.
관우의 죽음은 삼국지연의 독자들에게 답답한 마음을 넘어 애절한 마음을 갖게 한다. 그것은 천하제일의 명장으로서, 충의의 화신으로서 승승장구하던 관우의 모습이 삼국지연의에 넘쳐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우는 교만했다. 여몽이 열 살 어린 무명의 육손을 후임으로 추천하고, 육손이 지극히 겸양한 서간을 보내 관우로 하여금 경계심을 늦추게 한 것도 이러한 관우의 교만한 성격을 간파하고 역이용한 것이다. 관우의 강한 자존심과 교만함은 결혼동맹을 제안한 손권에게 '범의 딸을 개의 아들에게 시집보낼 수 없다'는 거절에서 보듯 오만 방자함으로 변한다. 교만함과 오만으로 인해 형주를 잃은 것이다.
관우의 수급은 낙양의 조조에게 보내졌다. 유비의 복수가 두려웠던 손권은 관우참수가 조조의 지시였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조조는 손권의 속임수를 눈치 채고 향나무의 침향으로 몸체를 만들어 왕과 제후의 예로 장사를 지냈다. 유비의 원한을 오나라로 향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손권도 일의 중함을 알고 당양에서 장사를 지냈다.
이를 두고 민간에서는 '머리는 낙양에 정착해 있고 몸은 당양에서 곤고하니, 혼은 고향으로 돌아간다'라고 한다. 많은 관제묘 중에 낙양과 당양 그리고 해주의 관제묘가 유명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관우는 죽어서도 대단한 활약을 한다. 먼저 그의 혼이 당양의 옥천산(玉泉山)에 자주 나타났는데 보정 선사의 가르침을 받고 깨달은 바가 많아 이후 백성들을 보살폈다고 한다.
또한 조조를 기절시켜 얼마 살지 못하게 하였으며,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의 여몽에게 혼이 실려 손권에게 욕을 퍼붓고 여몽을 피토하며 죽게 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참혹하게 죽은 관우를 위로하고 아울러 신격화하는 장치들이다.

관우의 유체가 매장된 관릉을 향했다. 후베이성(湖北省) 당양(堂陽)에 위치한 관릉은 모든 관제묘가 그러했지만 3대 관제묘답게 관우를 기리는 향불 냄새가 경내에 가득하다.
장판파 전투가 벌어졌던 기슭에 위치한 관릉은 2만 평방미터의 능원으로 정전과 전각, 참배전 등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능묘는 맨 안쪽에 있는데 높이가 7미터, 둘레가 70여 미터인 커다란 원형의 무덤에 한수정후묘(漢壽亭侯墓)라 쓰여 있다. 무덤 위로는 고목이 우거져 방문객의 더위를 식혀준다.
대로변에 위치해서인가. 아니면 오늘도 관우를 숭배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염원은 빌고자 함인가. 아침임에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후한 말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곳은 남송 때 중건되고 명나라 시대에 사당과 건축물이 본격적으로 지어졌는데, 이때가 관우의 신격화가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팔각정과 춘추각 그리고 비석이 있는 회랑 등을 둘러보며 전투에서는 영웅이었지만 전략에서는 극히 평범했던 관우를 떠올린다. 대의를 무시하여 국가를 패망으로 이끈 그가 충과 의로 인해 신격화되었음은 결국 봉건주의사상에 꼭 필요한 충성과 복종의 이데올로기가 관우를 통해 구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무신(武神)의 자리로까지 격상한 것이다.
관우가 마지막 저항을 한 곳은 맥성(麥城)이었다. 하지만 목숨을 잃은 곳은 이곳이 아니다. 맥성 유적은 당양시에서 남동쪽으로 25㎞ 떨어진 지점인 맥성촌 부근인데, 저하(沮河)와 장하(?河)의 사이였다. 지금은 강의 범람으로 물줄기가 변하여 유적지가 저하의 동쪽에서 저하의 서쪽으로 변해 있었다.
맥성은 그 옛날의 흔적을 살펴보기에는 너무도 초라했다. 성벽의 일부만이 조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관우가 적에게 포위되어 도움 없이 죽음을 앞두고 있던 비참함과 다름이 없다. 중국인들은 힘들고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면 '맥성 간다'라고 비유하는데, 이 말은 액운이 끼었다. 운이 따르지 않는다는 뜻을 의미한다.
관우는 200여기의 병력을 이끌고 맥성을 빠져나가 서쪽으로 도주한다. 하지만 필사의 탈출은 곳곳에 숨어 있는 적군의 공세에 눌려 실패한다. 관우 부자가 붙잡힌 곳은 회마파(回馬坡)라는 곳이다. 이곳에는 15㎞에 달하는 나한욕(羅漢?)이라는 협곡이 있는데 형주, 사천, 섬서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청나라 동치 때 회마파에 비석이 있었는데, '아아, 여기가 성인이며 황제인 관공이 임저에서 촉나라로 들어가려 할 때, 오나라 군을 만나 말을 돌렸던 곳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지금은 도로가 비석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도로 옆에는 2층으로 지어진 높이 8미터의 팔각정이 있다. 무신 관우의 유적인지라 노란색의 유리 기와로 만들어 놓았다.
옥천사(玉泉寺)는 관우가 죽어 신이 된 곳이다. 옥천사가 있는 옥천산은 당양시 장판파에서 서쪽으로 15㎞ 지점에 있다.
산의 모습이 배가 뒤집힌 것과 같아 원래는 복선산(覆船山)이라 불렀다는데, 우리나라 산처럼 수풀이 우거지고 경관이 좋다. 입구를 들어가니 13층의 옥천철탑이 우뚝하다. 이 탑은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높은 철탑이라고 한다.
옥천산으로 들어가는 산문(山門)은 철탑 계단 아래에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을 따라 더위를 식히며 올라가니 산비탈에 '한운장현성처(漢雲長顯聖處)'라고 쓴 돌기둥이 보인다. 이곳이 관우가 혼이 되어 나타난 곳이라고 한다. 옆에는 당나라 때 세운 비석도 있다. 관우가 칼을 갈았다는 '관공마도석(關公磨刀石)'도 놓여 있다.
옥천사의 원래 이름은 보정사(普淨寺)였다. 보정 고승이 이곳에서 참선을 했기 때문이다. 보정스님은 관우가 조조와 이별하고 오관을 통과할 때 세 번째 관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준 스님이다.
수나라 때부터 본격적인 모습을 갖춘 옥천사는 절의 중심건물인 대웅보전보다도 더 중요한 건물이 있다. 그것은 오른쪽 언덕에 지어진 조금은 허름한 옥천전(玉泉展)인데, 이곳이 관우를 모신 최초의 사당이기 때문이다.
중국인의 관우에 대한 믿음은 엄청나서 관우는 재물신이 된 지 오래다. 이 또한 관우와 동향인 산서상인들이 전파한 것인데, 관우는 중국뿐 아니라 화교문화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손길이 닿아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관우에 대한 사상과 숭배를 일컬어 '관우문화'라고 하는데, 이들에게 관우는 오늘도 진정한 신의 모습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글·사진=허우범 인하대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관우가 필사의 탈출에도 불구하고 아들 관평과 함께 사로잡힌 회마파.
옥천사에 있는 한운장현성처(漢雲長顯聖處). 죽은 관우의 혼령이 나타난 곳이라고 한다.
당양 관릉의 관우묘. 머리를 제외한 유체가 묻혀있는 곳이다.



관우가 마지막 결전을 벌였던 맥성터.
'관우 신격화' 지배계급 통치수단으로 이용
관우의 최후는 한 시대를 풍미한 명장으로서는 쓸쓸한 종말이었다. 게다가 이미 신격화가 추진되고 있는 상황에서 관우가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은 극히 불손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관중은 관우가 잡혀 피살된 부분의 자료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성을 갖춘 인간으로 묘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삼국지평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관우존중사상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청나라의 모종강도 관우를 존경했다. 하지만 역사적 기록에 근거하여 천상의 신이 말한 부분을 과감히 삭제하고 관우의 피살과정을 자세히 묘사했다.
관우의 최후는 모종강의 손을 거쳐 비로소 역사적 진실에 부합되고 문학성도 한껏 발휘된다. 하지만 관우의 신격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모종강 역시 그러한 신격화와 관련하여 개연성 있게 묘사된 부분은 그대로 두었다. 관우의 혼령이 옥천사에 나타나 보정의 가르침을 받고 승천한 것, 여몽의 몸을 빌려 손권을 매도하고 여몽을 죽게 한 것, 조조가 관우의 수급을 보는 순간, 관우의 눈이 부릅뜨고 머리카락과 수염이 곧추서서 조조가 놀라 졸도하고 결국 죽게 하였다는 것 등이다. 여몽은 형주를 탈환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는 관우가 죽은 그 달에 각각 앓아오던 질병으로 죽었다. 작자는 이러한 부분을 모두 관우의 신성이미지에 할애한 것이다.
관우의 생전 관직명은 전장군이고 작위는 한수정후였다. 전장군은 그가 죽던 해인 219년에 유비가 한중왕이 되면서 부여한 것이고, 한수정후는 관우가 조조의 휘하에 있던 200년에 받은 것이다.
'전장군 장목후'라는 시호가 추증된 것은 후주 유선이 통치하던 260년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관우는 일반적인 관습에 의한 시호의 추증이었고 신격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이후 관우신앙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옥천사에 '현열묘(顯烈廟)'라는 황제의 친필 현판이 하사된 것은 송나라 철종 때인 1096년이었다.
이어서 북송 말기 휘종 때에는 관우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휘종은 이민족의 침입과 민중봉기가 빈발하자 관우의 힘을 빌려 국가적 난국을 타개하고자 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관우신격화 사업은 청나라 말기까지 계속 이어졌는데, 이는 역대 왕조의 고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관우신에 의지하여 국가를 통치하고자 했던 지배계급의 나약성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곪은 상처를 도려내지 않음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게다가 역대 위정자가 요구한 것은 군신, 부자, 형제라는 종적관계를 중시한 유교적인 충의였다.
하지만 민초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공통된 목적 아래 힘을 모으고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는 충의가 필요했다. 역대의 위정자와 민초들이 관우를 숭상했지만 이처럼 서로의 믿음이 달랐던 것이다. 전자가 '공맹적' 충의라면 후자는 이에 대항한 '묵자적' 충의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