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 솔직담백함 백성 사로잡다
후베이성 당양의 진입로에 있는 십리장판 패방. 조자룡의 단기구아두(單騎救阿斗), 장비의 위진장판교(威鎭長坂橋)의 역사적 사실이 당양의 십리 벌판에서 이루어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내가 바로 연인(燕人) 장익덕이다. 어느 누가 나에게 목숨을 내놓겠느냐!"
장비가 말을 타고 장판교 어귀에서 벽력같은 고함을 질렀다. 호랑이 수염을 곧추세우고 고리눈을 부릅뜬 채 장팔사모를 뻗쳐들고 노려보는 모습이 너무도 당당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다리 건너편 숲속에는 흙먼지가 자옥하다. 매복한 병사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조조의 5천 정예기병은 진격할 수 없었다. 조조가 확인하러 현장에 도착했다. 장비가 한층 더 큰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쩌렁쩌렁함이 호랑이가 포효하는 것 같았다.
조조는 관우가 한 말이 떠올랐다. "내 아우 장비는 백만 적군 속으로 들어가 장수의 목따기를 마치 식은 죽 먹 듯 한다." 조조가 장수들에게 각별히 주의시킨 그 장비가 지금 앞에 서있었다. 조조는 장비의 위세가 등등함을 보고 뒤로 물러났다.

장판교 어귀에 살기가 등등하니
당양 장판파공원 안에 재현된 장판교 위에서 호통
치는 장비의 모습.

창 비껴들고 말 세운 채 고리눈 부릅뜬다
한 마디 호통소리 천둥처럼 진동하니
혼자서 조조의 백만 대군 물리쳤도다

유비는 조조의 추격에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달아나야만 했다. 관우와 제갈량이 도움을 청하러 갔지만 소식은 없이 애간장만 타고 조자룡은 아두를 구하느라 피범벅이 되었다.
추격군은 거리를 더욱 좁혀오고 구원병이 올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믿을 사람은 장비뿐이었다. 장비는 20여기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해오는 조조군을 저지해야만 했다. 장비가 꾀를 내었다. 말꼬리에 나뭇가지를 묶고 숲속에서 먼지를 일으키게 했다. 적을 속이지 않고는 천하의 장비라 하더라도 시간을 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조군이 물러나자 장비는 다리를 끊었다. 조조의 추격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전략적이지 못한 장비의 생각은 순진했다. 조조군은 복병이 없음을 알고 다시 추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유비는 장비의 분전으로 시간을 벌어 한수(漢水) 방면으로 달아날 수 있었고, 관우가 이끌고 온 수군과 합류하여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웨저우(鄂州) 서북쪽인 판커우(樊口)로 피할 수 있었다.
장판파 전투에서의 패배는 유비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용맹과 지략을 갖추고 장판교에서 조조군을 무찌른 장비야말로 삼국지연의가 만들어낸 문제아(問題兒)적 인물 전형을 단숨에 깨뜨리고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장비의 호쾌한 무용담이 서린 장판교는 당양(當陽)에서 북동쪽으로 4㎞ 지점인 패릉촌에 있다. 장판교는 원래 패릉교(覇陵橋)라고 불렀다. 옛날에는 당양의 관리들을 이곳에서 영접하거나 배웅했기 때문에 관교(官橋)라고도 했다. 장판파와 가깝기에 장판교라고도 부른 것이다.
패릉촌은 산을 등지고 있는 아담한 마을로 앞에는 넓은 평지로 논들이 펼쳐져 있다. 우리의 시골풍경을 보는 듯하다. 논에서 서쪽 끄트머리인 삼거리에는 '장익덕횡모처(張翼德橫矛處)'라고 쓴 비석이 있는 정자가 있다. 이곳이 장비가 조조군을 무찌르며 영웅의 기개를 드높였던 장판교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이곳에는 물의 흐름을 조절하는 봇둑과 다리가 있었으며, 장판파의 두 영웅인 장비와 조운을 제사지내는 장조사(張趙祀)라는 사당도 있었다고 한다.
원래의 다리 이름이 패릉교인 것도 바로 봇둑(覇)과 사당(陵)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다리도 사당도 없다. 흐르던 물길도 사라졌다. 장판교 밑을 흐르던 저하(沮河)의 흐름이 남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오직 '장익덕횡모처'라는 비석 하나만이 치열했던 현장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지나가는 나그네의 휴식처이거나 바쁜 일손들이 비를 피해 잠시 숨을 돌리는 장소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당양 8경 중 하나가 패릉연우(覇陵煙雨)인데 비 그친 후, 이곳 정자에서 마을 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꼭 그와 같을 것만 같다.
 
장비가 대갈일성(大喝一聲)으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친 장판교 자리에 세워진 기념 비석. 청 옹정 9년(1731년)에 후손인 장예 환이 다시 세운 것이다.

지금의 저하는 당양 시내 북쪽으로 흐른다. 이곳에는 길이 오백 미터의 현대식 당양교가 있는데 양쪽 난간에는 장판파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조운과 장비의 이야기가 조각되어 있다.
조조군이 당양교에서 물러난 것은 장비의 대갈일성(大喝一聲)과 매복의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5천의 정예기병이 어찌 장비의 목소리에 모두가 하나같이 주눅들 수 있겠는가. 무리한 추격에 따른 피로감과 적진 깊숙이 침투한 선발대의 위험성, 점령지 양양에 대한 대책마련 등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두를 고려한다고 해도 추격군이 도망자와 마주치고도 싸움 한 번 없이 거꾸로 물러난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석연찮다. 정녕 이유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장판교는 조조군이 도착하기 전에 장비가 미리 끊어놓았다. 다리가 끊어졌으니 진격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장비의 처는 하후패의 사촌여동생이었다. 건안 5년(200년)에 땔나무를 구하던 열 서너 살의 처녀를 장비가 욕보였는데 양가집 규수임을 알고는 처로 삼았다. 장비답게 결혼식을 올린 셈이다.
하후패는 조조의 친척이자 심복인 하후연의 차남이다. 어찌되었거나 장비는 하후연의 당질녀와 결혼하였으니 그 또한 5촌인 셈이다. 조조의 부친인 조숭은 대환관인 조등의 양자인데 본가가 하후씨(夏候氏)였다. 조숭은 하후씨의 아들이고 하후돈의 숙부였다. 그러므로 조조는 하후돈과 사촌형제 사이이고, 하후연과도 가까운 사이인 셈이다.
아무리 전쟁터라 하여도 가까운 친인척이 사생결단으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왕래가 가능하던 삼국시대에는 더욱 그러했다. 장판교까지 추적해온 조조군의 장수는 하후돈, 하후연, 조인 등이었다. 따지고 보면 장비와는 인척인 장수들이었다. 장비의 무예가 출중한 것도 있지만 이러한 친척사이의 정의(情義)가 작용했기 때문에 장판교에서의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장비와 조조 그리고 하후씨 집안과의 관계가 역사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나관중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간략한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도 한 편의 장황한 이야기를 만들던 그가 어찌하여 침묵을 지켰을까. 그 이유는 촉한정통론에 있다.
유비집단이 주인공이고 조조집단은 쳐부숴야 할 적인데 유비의 심복인 장비가 이러한 악인집단과 가까운 인척관계라는 것을 작품 속에 표현한다면 어찌되겠는가. 그야말로 일취월장하는 삼국지연의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가 발생할 것은 뻔한 이치다. 중국의 춘추필법 사관이 삼국지연의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나는 것이리라.
/글·사진=허우범 인하대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장비 솔직담백함 백성 사로잡다
장비는 술과 고기를 파는 푸줏간 주인이었다. 신분적으로 하층민인 셈이다. 힘은 천하장사이고 성격은 불같이 사나워서 망나니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난세인지라 망나니 장비의 힘도 써먹을 때가 있었다. 그리하여 유비 관우와 함께 삼국시대의 주인공이 되었다.
장비는 자가 익덕(益德)이고 탁군(지금의 하북성 탁주) 사람이다. 탁군이 연(燕)나라 지역이었기에 '연인 장비'라 했다.
팔척 신장에 표범 같은 머리, 고리눈에 호랑이 수염을 한 장비는 험상궂은 외모와 함께 목소리 또한 우렁차서 마치 뇌성벽력이 치는 듯했다.
한 마디로 무식하고 거칠며 잔인해보이기까지 하는 장비의 성격은 교양과 도덕적 품성을 중시하는 귀족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장비는 일반 백성층에서 인기가 높았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고 단순쾌활하며 솔직담백한 성격에 끌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작자에 의해 가공된 점이 없지 않다.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인 유비, 관우, 장비는 각각 최상위 계층과 중간계층 그리고 하위계층을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장비도 무식하지만은 않았다. 당양교에서 20여기의 기병에게 매복전략을 꾸미게 하여 5천의 조조군을 물리친 것이나, 파군태수 엄안을 진심으로 굴복시킨 일 등은 장비의 지혜로운 모습의 일면이다.
원나라 때에는 삼국지연의 전 단계 작품인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가 유행했다. 이 작품은 장비의 무용담과 제갈량의 지략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고 있다.
하지만 전기적(傳奇的)인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불한당 장비의 모습이 곳곳에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서민들이 장비를 가장 좋아하였던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영웅호걸의 모습이 바로 장비와 같은 이미지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비의 이미지는 삼국지연의로 오면서 전기적 색체가 사라졌다. 그와 함께 이야기의 중심에서 한 발짝 옆으로 비켜났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서민층으로부터 장비는 여전히 사랑을 받는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지위고하가 아닌 시비와 선악으로 대하고, 정치적인 이합집산이나 가식적인 행동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은 그것이 최고의 권력자라 해도 변하는 법이 없다. 장비가 항상 서민층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그들이 바라는 인물의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장비는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술꾼이었다. 술로 인해 여포에게 서주성을 빼앗기기도 했지만 술로 인해 장합을 무찌르기도 했다.
또한 장비는 윗사람에게는 유순했지만 부하들에게는 엄했다. 장비의 행동거지를 걱정하던 유비가 "매일 병사들에게 채찍질을 하면서 그들을 측근에 임용하는 것은 화를 초래하는 일"이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장비는 깨우치지 못했고, 급기야는 유비와 함께 오나라를 공격하려할 때 부하 장수들에게 살해됐다.
술과 채찍질이 결국은 장비의 죽음을 재촉하였으니, 폭주를 좋아하고 매사에 덕을 베풀지 못하는 자치고 그 화를 면하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 하겠다.
 
장판파의 두 영웅인 장비와 조운을 기리는 각종 비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