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중원이 곧 천하다(11) 망국과 건국의 사이에서
한나라 마지막 황제인 헌제가 위나라 조비에게 황제 자리를 선양한 수선대. 망국과
건국의 희비가 교차한 격동의 현장이다.
서기 220년 10월 28일 새벽. 일진광풍이 허도의 번양(繁陽)에 쌓은 수선대를 한바탕 휩쓸었다. 수선대 주위를 휘감은 오색 깃발이 미친 듯이 흩날리고 몇 개는 부러졌다.
"한나라의 기운이 이미 쇠약하여 세상의 질서가 어지럽고 흉악한 무리가 이 틈을 노려 멋대로 반역을 저지르는 때, 조조가 나라의 어려움을 구하고 안정시켰으니 오늘의 천하는 곧 그의 덕이라. 이제 조비는 이를 받들어 더욱 대업을 넓히고 밝게 빛내라. 이는 요순의 선위와 같은 것이요 덕 있는 자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니 조비는 엄숙하게 천명을 받들지어다."
선양책을 읽고 옥새를 바치는 헌제의 두 눈엔 뜨거운 눈물이 맴돌았다. 단 아래 백성들은 희비가 교차했다. 하지만 그뿐, 만세소리 드높게 위나라 시대가 시작됐다. 모든 절차는 평화적이고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선양을 마치고 대에서 내려오는 헌제의 두 볼에는 회한의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한나라 사백년 사직, 32년의 천하가 눈물에 잠겨 떠내려갔다. 주악소리는 망국의 황제가 된 헌제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넋조차 사라지게 했다.

헌제사당 안에 있는 삼절비. 오른쪽이 권진표,
왼쪽이 수선표이다.
가운데는 헌제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황제에 오른 조비는 자신이 연강(延康)이라 했던 연호를 황초(黃初)로 고치고 나라 이름을 대위(大魏)라고 했다. 부친인 조조가 이루어놓은 권력을 발판삼아 자신의 뜻을 이루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무백관의 벼슬을 올려주고 천하에 대사면을 내려 민심을 다스렸다. 나라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 지명의 이름도 바꿨다. 번양을 번창(繁昌)으로 허도를 허창(許昌)으로 고쳤다. 수선대에서의 선양으로 대내외에 위나라의 정통성을 알리고 후세에 이를 전하고자 '권진표(勸進表)'와 '수선표(受禪表)' 두 개의 비석을 만들게 하였다.

한 왕조의 비운과 위 왕조의 탄생을 동시에 간직한 수선대는 쉬창(許昌)시 서남쪽 17㎞지점의 번성진에 있다. 마을에 도착하니 밭 사이로 높이 20미터 정도의 황토구릉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격동의 현장이었던 수선대이다. 모두 3개의 단으로 구성된 수선대는 양쪽으로 돌계단을 통해 올라가도록 되어 있었고, 정상에는 정자를 세워 그 속에 옥좌를 놓았다고 한다. 위나라의 개국을 만천하에 알리는 행사였기에 그 무엇보다도 화려하고 거대하였으리라. 그러나 천 년이 넘는 풍우 속에 무너지고 씻겨나가 지금은 가축과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한 채 사각형으로 된 한 개의 대만 남아있다. 수선대임을 알리는 표지석도 사라진지 오래다. 단 위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마을밖엔 오로지 벌판뿐이다. 조비가 양위를 받고 호쾌하게 웃은 자리는 사라졌지만, 헌제가 단을 내려오며 한숨짓던 곳은 반드시 이곳 어디일 것이니, 역사 역시 진정한 모습만은 보여주려 애쓰는가보다.

간신이 권력 잡아 한나라가 망하는데
선양이라 거짓말하며 요순을 본받자하네.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위를 우러러 받드니
하루아침에 옛 강산을 모두 잃었네.

마을 안으로 들어오니 헌제의 사당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진기한 보물인 권진표와 수선표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권진표에는 한나라의 녹을 먹은 신하 49인이 조비에게 황제에 오르도록 권유하는 문장과 함께 자신들의 이름을 조각해 놓았다. 수선표에는 헌제가 양위를 해야 하는 당위성이 유려하고 화려한 필체로 새겨져 있다. 이 두 비석은 한나라 말기의 세 명장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비문은 어사대부 왕랑이, 글씨는 당대 대표적 서도가인 양곡이, 그리고 조각 역시 서도가로 이름난 시중 종요가 맡았다. 일명 삼절비(三絶碑)라 일컫는 이 비석은 왕희지와 소동파를 비롯하여 많은 문인과 학자들이 찾아와 감상하였는데, 그 감회가 어떠하였을까. 진기함에 웃고 자랑스러워함에 웃고 화려한 치장에 또 웃었으리라.

산양공(山陽公)에 봉해진 헌제는 하내군 산양현에서 파란만장했던 삶을 정리하며 여생을 보냈다. 소제의 이복동생으로 태어난 헌제 협(協)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인 왕미인(王美人)을 잃었다. 소제의 모친인 하황후의 질투에 의해서다. 할머니인 동태후의 손에 자란 헌제는 진류왕(陳留王)에 봉해졌다가 동탁이 정권을 잡고 옹립함으로써 헌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실권은 동탁에게 있었고 황제는 허울뿐이었다. 헌제의 꼭두각시 황제노릇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된 후 이각과 곽사에 쫓겨 낙양으로 돌아왔고, 조조의 보호를 받아 허도로 자리를 옮겼다. 허도의 생활은 조조의 정치적 명분 쌓기에 일조하는 것일 뿐 황제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오히려 세 번의 조조제거사건이 모두 실패함에 따라 헌제의 하루하루는 감옥과도 같은 생활이었다.

헌제의 선양소식은 헌제가 피살되었다는 살이 덧붙여져서 성도의 유비에게로 전해진다. 유비는 문무백관과 함께 상복을 입고 통곡하며 민제(愍帝)라는 시호를 올린다. 중국 역사상 두 개의 시호를 받은 것은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유협이 유일하다. 이는 왕권의 정통성과 관련되어 분열과 반목중인 국가 사이에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역사는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의 시호를 헌제로 적고 있다. 따라서 그의 무덤도 헌제릉이었다. 그러나 명대 이후 사람들은 삼국지연의에 푹 빠져 헌제를 민제라 부르면서 능도 민제릉이 되었다. 민(愍)자가 '근심하고 불쌍히 여긴다'는 뜻이니 마지막 황제의 운명을 동정하는 삼국지 마니아의 마음이 황제의 칭호까지도 바꿔놓은 것이다.

민제릉은 쉬창시 동쪽 15㎞ 떨어진 곳인 장반진(張潘鎭) 정부의 정원에 있다. 이곳은 황제의 의관총이기도 한데, 높이가 10m 폭이 20m 가량의 네모진 능이다. 왼쪽으로는 계단이 나있다. 예전에는 이곳 정상에 헌제의 사당이 있었고 각종 석상과 복숭아나무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흔적도 없다. 파헤쳐지고 버려진 곳엔 조그마한 밭두둑만 나란하다. 황제릉 꼭대기에 밭을 일군 사람은 누구일까. 무슨 생각으로 채소를 심었을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떳떳하게 그리고 보란 듯이 벌여놓은 심사는 무엇일까. 중국인의 사고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유가를 정통으로 하되 법가도 필요하다. 문치를 내세우지만 무력 또한 중시한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음양의 이치처럼 끊임없이 변화하고 항상 현실적이다. 황제릉으로 쳐다보는 것보다는 생산성 있는 한 뼘의 땅이 더 소중한 것이리라. 그렇다하더라도 문물보호지역을 이토록 허술하게 관리하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위는 한나라를 먹었고, 진은 조씨를 먹었으니
하늘의 운수는 돌고 도는지라 피할 길 없구나.
꼭두각시 황제로 일평생 한 많은 삶을 살았으련만
지하의 수레바퀴를 놓지 못하니 이 어찌된 일이오.

중국 역사에서 최고의 시대였던 한나라. 그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릉이 이토록 훼손된 채 버려진 것은 마지막 황제의 애끊는 운명을 떠올리게 하려는 고상한 생각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저 망국처럼 잊힌 황제가 되어 이토록 처참한 폐허 속에 누워있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역사와 현실은 승자의 것, 창업과 건국에만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황량한 폐허로 변한 민제릉. 원래는 헌제릉이었지만 유비가 추존한 시호
를 따서 명대부터 민제릉으로 불렀다.
권력 찬탈의 평화적 수단 '선양'
덕 있는 자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왕위(王位)는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즉, 황제의 자리를 자식에게 세습하지 않고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순임금이 우(禹)임금에게 양위한 것처럼 덕 있는 이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전설상의 이야기이고 왕조는 부자 세습이나 종친 세습으로 이어졌다. 역사적으로 선양의 형식을 빌려 왕조를 찬탈한 것은 조조의 아들 조비가 처음이었다.
조비는 부친인 위왕(魏王) 조조가 죽자 연호를 연강(延康)으로 바꿨다. 헌제가 힘은 없지만 황제자리에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연호를 바꿨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황제를 하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요순의 전설을 빌미로 짜고 치는 고스톱인 양, 세 번의 사양을 거친 후 헌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았다. 덕 있는 자에게로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만천하에 공표함으로써 정통성을 획득하고 손쉽게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220년. 조비는 스스로 위나라 황제가 됐다. 조비에서 시작된 위나라는 조예, 조방, 조모, 조환 등 5대 만에 단명했다.
264년 사마소가 진왕(晉王)에 오르고 265년에는 그의 아들인 사마염이 원제(元帝)인 조환으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았다. 조비가 한나라의 헌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은 방법 그대로 조환이 진(晉)나라에게 선양했으니 사필귀정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진나라는 곧 북방유목민족인 오호(五胡)의 침략으로 무너지는데, 오호십육국의 하나였던 후조(後趙)의 태조 석륵(石勒)은 조씨와 사마씨의 선양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짐이 만약 한 고조를 만난다면 당연히 신하가 되어 섬기겠다. 한신이나 팽월이라면 어깨를 나란히 할만하다. 광무제를 만난다면 당연히 중원을 놓고 겨루겠다.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대장부는 일을 벌일 때 해와 달이 비추듯이 정정당당해야 한다. 조맹덕과 사마중달이 세상 사람과 고아, 과부를 속여 여우처럼 아양을 떨어 천하를 얻은 것은 끝내 본받지 말아야 한다."
동진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恭帝) 사마덕문도 송왕(宋王) 유유(劉裕)에게 선양을 했다. 송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 또한 제(齊)나라를 세운 소도성(簫道成)장군에게 선양이라는 미명 아래 제위를 빼앗겼다.
이처럼 모든 역사는 평화를 가장한 정권찬탈의 연속이었고, 이는 비단 중국만의 일은 아니다. 덕은 항상 외롭고 덕망 있는 자는 가까이에 없으니 어찌 요순의 시대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