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받은 땅, 인천 /조우성/시인

‘왕이 무릎을 꿇었다.’면 이유야 어떻든 어느 나라에서나 그 자체가 예삿일일 수 없다. 그런데 이번 주 여러 신문은 인간으로서 신(神)의 반열에 올라 있는 일왕(日王)이 국민들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전해 눈길을 끌었다. 주인공은 맥아더 사령부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숨을 죽이던 히로히토가 아니라 그의 아들 아키히토였다.
아키히토는 선왕처럼 한 순간에 두 도시를 쓸어버린 불의 심판에 굴복한 것이 아니었다. 수상 고이즈미가 이웃 나라의 원성을 들어가며 일본식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매년 정성스럽게(?) 야스쿠니 신사에서 빌어 왔음에도 사정없이 들이닥친 초특급 태풍과 지진에 두 손을 들고 만 것이었다.
NHK에 비쳐진 일본은 초비상이었다. 하늘과 땅이 합세해 마치 세상을 벌하려는 듯 몰아치고 있었다. 올 들어 벌써 10개째나 태풍이 들이닥쳤고, 지진까지 계속 일어나 사상자가 속출했다. 기상 관측사상 한해에 이처럼 많은 태풍이 몰려들기는 처음이라며 일본 국민들은 망연자실이었고, 그래서 극히 이례적으로 왕이 나서서 흉흉해진 민심을 달랬던 것이다.
'방재(防災) 모범국'으로서의 체면도 말이 아니게 됐다. 태풍이야 그렇다 치고, 지진 대비는 국가 명제가 될 만큼 온 신경을 써왔던 부분인데 지난달 23일 현재 가옥 파괴 389채, 도로 붕괴 453개소, 산사태 58개소 등이 벌어진 것이다. 특히 일본이 세계에 자랑해 온 신칸센(新幹線)의 안전성(安全性)마저 40년만에 깨져 자존심마저 구겼다.
그런데 묘한 것은 한일간에는 기후마저 이해(利害)가 상반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에서도 이따금 태풍이 말썽을 피우곤 하지만, 그래도 그것들은 ‘효자(孝子)’급이다. 기세 등등하게 동북아로 치고 올라오던 태풍들은 대부분 약속이나 한 듯 일본 쪽으로 방향을 틀고, 그 여세를 따라 부는 비바람 역시 삼복 염천을 식혀주는 데다가 육해공(陸海空)을 한바탕씩 뒤집어 공해로 찌든 땅과 하늘을 정화시켜주니 말이다.
설혹 태풍이 영호남에 상륙했다 해도 인천 지역에서만은 거의 맥을 못 춰 왔다는 게 자못 신통하기만 하다. 1925년에 사망자 648명을 낸 을축년(乙丑年) 대홍수 때도 경인선이 이틀간 불통되는 것으로 액땜을 했던 태풍 안전지대 인천(仁川)이었다. 수년 전, 기상 위성이 찍은 사진만 봐도 움찔해질 거대한 태풍의 눈이 인천 상공 한가운데를 지날 때도 별 피해가 없던 일이 새삼 돌이켜진다.
그렇듯 우리가 살고 있는 인천은 ‘복 받은 땅’임에 틀림없다. 이런 사정을 뒷받침해 준 분이 해군사관학교 조일도 교수이고, 역사적으로 입증한 사서가 조선왕조실록이다. 조 교수는 1956년부터 40년간 전국 11개 항구에 영향을 미친 태풍 125개를 분석한 논문에서 인천항 100마일 이내로 근접해 위협을 준 태풍은 34개에 불과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전국 11개 항구 중 인천항이 가장 안전한 곳임을 입증하는 것이라 한다.
조선왕조실록도 비슷한 사정을 전하고 있다. 태조 이성계 때부터 500여 년간 인천에서 벌어진 천재지이(天災地異)는 해일 11건, 지진 18건, 벼락 2건, 우박 4건이었고, 아비규환을 연상케 하는 ‘일본 지진’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태풍에 관한 기록은 그나마 단 한차례밖에 없었다. 용케도 500여 년간 큰 지진과 참혹한 태풍이 비켜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삼남(三南)에 비하면, 인천은 조상의 음덕(陰德)으로 편히 살고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다. 더불어 인천 연안을 따라 발달되어 있는 갯벌 역시 큰 복덩이요, 인천 앞바다의 간만의 차 또한 태생적 딜레마로만 볼 것도 아니란 생각이다. 갯벌은 보호되어야 하겠지만, 적은 돈으로 땅을 재생산해 낼 수 있는 천혜의 자원이며 간만의 차로 인해 입출항의 어려움은 있으나 인천항 ‘도크’가 그 애로를 극복해 오고 있는 것은 두루 아는 바와 같다. 반면에 아침저녁으로 들고 나는 감탕빛 바닷물의 신선함과 에너지 난을 극복할 대안으로 조력발전소도 미구에 세워질 전망인 것이다.
최근 인천의 화두는 ‘다리’이다. 송도신도시와 영종도를 잇는 연륙교의 폭을 두고 설왕설래가 있었다. 물론 선박의 입출항이 자유로워야 할 것은 당연한 노릇이고, 앞날을 걱정하는 인천사람들의 뜻 역시 존중되어야 한다. 다행히 여느 일과는 달리 인천시, 지역 인사들, 여야 의원들 모두가 모처럼 얼굴을 맞대고 궁리하는 모습이 보기에도 흐뭇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다. 천혜의 땅 인천을 이처럼 다같이 걱정하며 살면 만사 형통하리라 믿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