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베이성을 가다(하) 난세의 영웅과 전설
 크고 작은 나라가 세워지고 망하길 반복하며 5천년의 유구한 세월을 이어온 중국. 그 기나긴 역사의 시간 속엔 언제나 ‘영웅’이 등장했고, 그들은 변화의 중심에서 중국을 이끌었다. 그런 중국이 또 다시 변화의 물결을 맞고 있다.
 장비의 고향 줘저우 또한 그랬다. 삼국지의 세 영웅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의 결의를 맺은 조그만 마을은 서서히 관광지로서 면모를 찾아가고 있었다.
 진입로 공사가 한창인 가운데 사원앞에서 우연히 마주한 이름모를 한 촌로(村老). 마을의 변화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갓 수확한 옥수수를 말리던 촌로는 넉넉한 웃음으로 옆에서 칭얼대는 어린 손자를 품에 안았다. 젊은 시절 격랑의 문화대혁명기를 거쳤을 그는 눈부신 햇살에 잔뜩 찌푸린 손자를 넉넉한 웃음으로 바라보며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영웅’만이 남아있는 5천년 중국의 역사는 이름없는 죽어간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토사구팽
 ‘유방’(劉邦)이 한(漢)나라를 세우기까지 대장군 ‘한신’(韓信)의 역할은 컷다. 그러나 한신은 제나라를 점령하고 스스로 ‘제후에 봉해달라’는 표를 올려 유방의 노여움을 사게된다. 유방은 한신을 초나라왕에 올리지만, 괴씸죄에 걸린 한신은 결국 ‘회음후’로 강등되고 만다. 위기에 몰린 한신은 반란을 기도하지만 황후 여씨에게 주살된다. 세상 사람들은 한신의 죽음을 놓고, ‘토끼사냥에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사냥개는 결국 잡아먹힌다’하여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을 남긴다.
 여하튼 한신은 한나라의 대장군으로 수 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영웅으로 기억된다. 가장 유명한 전투가 ‘배수진’을 펼쳐 3만 군사로 조나라 30만 대군을 물리친 싸움이다.
 이 싸움의 결정적인 역할은 한신이 몰래 키운 ‘특공대’다. 한신은 스쟈좡(石家庄)시 인근 돌산 정상에 2천명의 정예군사를 몰래 키운다. 배수진을 펼친 한신의 군사들과 싸우기 위해 조나라 군사들이 성을 비운 사이, 이들 특공대는 성을 점령한다. 성을 잃은 조나라 군사들은 혼란에 빠지고 한신은 싸움에서 크게 이긴다.
  한신이 군사를 먹이기 위해 송아지까지 안고 올라가 농사를 지었다하여 ‘보우더산’(抱犢山)이다. 해발 580m에 사방이 절벽으로 그 자체가 천혜의 요새다. 아래서 올려다 보면 부처가 누워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 중국정부가 한신 군사의 영채를 복원, ‘보우더채’(抱犢寨)로 잘 알려져 있다. 한신장군 기념관이외에도 오백나한을 모신 나한사와 옥황상제를 모신 금궐궁 등이 있다.
 유서깊은 중국내 다른 곳과 달리, 최근 콘크리트로 성곽을 쌓아 웅장함이나 비장미는 떨어진다. 하지만 초한지를 한번 읽어본 이들이라면 ‘한신’의 자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도원결의
 영원할 것 같았던 한나라의 황실 또한 새로운 영웅의 등장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한나라 말기 환관들이 황실을 좌지우지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칼을 들고 황건적이 된다.
 장비의 고향 탁현(현 줘저우)에서 유비 관우 장비 세 영웅은 ‘도원결의’를 맺고 ‘황실’을 다시 일으키려 군사를 일으킨다.
 조조 유비 손권은 저마다의 명분으로 나라를 세워 ‘위 촉 오’라 했고, 삼국은 자웅을 겨루며 한 시대의 역사를 열어간다. 하지만 천하통일은 ‘사마’씨의 손에 의해 이뤄진다.
 줘저우시 마을 입구에 말을 타고 서 있는 유비 관우 장비 동상이 도원결의가 여기서 있었음을 안내하고 있었다.
 이 세 영웅을 모신 사당 ‘삼의관’(三義官)에 이르는 진입로는 도로정비가 한창이다. 관광지의 면모를 찾아가고 있었지만 아직 시골마을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문화대혁명기 때 대부분의 건물이 파손됐다가, 1996년 복원공사를 시작해 2000년 공사를 완료했다. 유비와 관우, 장비를 모신 사당과, 유비의 가솔, 그리고 와룡 봉추, 조운 조자룡, 황충 등 가신들이 함께 삼의관을 지키고 있다.
 유비 사당 뒷편에는 무엇인가에 잘려나간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문화혁명 당시 부서진 비석을 남겨둔 것이라 했다. /김주희기자 kimjuhee@incheo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