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베이성을 가다-상)치세의 현장
 도로는 사람과 자전거, 승용차, 화물차가 마구 뒤엉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중국 허베이성(河北省)의 성도(省都)인 스쟈좡(石家庄)시 도로는 말 그대로 ‘무질서’ 그 자체였다.
 이는 비단 스쟈좡시만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난 10월22일부터 29일까지 팸투어 차 방문한 허베이성 내 6개 도시 모두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이해할 수 없는 ‘질서’가 숨어 있었다. 짜증이 날 법한데, 사고가 날 법한데도 꼬인 실타래를 슬슬 풀어가듯 저마다 제 갈 길을 잘 찾아가고 있었다.
 
 이번 팸투어는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당국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인천과 천진을 잇는 진천훼리와 대아여행사가 주관, 국내 여행사와 언론사 관계자들이 참가했다.
 허베이성은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北京)을 낀, 대성(大省)이다. 중국 문명의 창시된 곳이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이기도 하다. 한해동안 6천만명의 관광객이 찾을 정도로 풍부한 관광자원과, 자연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팸투어단은 허베이성 내 랑팡(廊坊), 청더(承德), 줘저우(탁주), 바오딩(保定), 스쟈좡(石家庄), 빠저우(覇州) 등 6개 도시를 방문했다.
 도시 곳곳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하듯 공사가 한창이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도로를 개설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도시와 달리 농가 모습은 한가롭기 그지 없었다. 밀과 목화가 자라는 평원이 끝없이 펼쳐지기도 하고, 산골 농가의 지붕에는 노란 옥수수가 지붕을 대신하고 있었다.
 ▲천하제1성(天下第一城)
 10월22일 오후 7시 팸투어 단을 싣고 인천항을 출발한 진천훼리 소속 ‘천인호’는 바닷길을 따라 하루를 꼬박달려 텐진(天津)시 탕구항에 도착했다.
 곧바로 랑팡시로 이동한 팸투어단이 첫 일정으로 찾아간 곳은 ‘천하제1성’. ‘중화’(中華)사상의 전형이다. 하늘 아래 ‘제일’이라고 자칭한 ‘제1성’은 1992년 공사를 시작, 1998년 완공됐다. 60만평 규모로 명(明)·청(淸)나라 때 수도인 베이징의 옛 모습을 재연했다.
 오전 9시 청나라 강희제가 친위대인 8기군의 호위를 받으며 나와 관광객을 맞이하면서 굳게 닫혀있던 제1성의 문이 열린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이외에는 고개를 숙인 적 없었던 ‘황제’는 명안궁에서 천제(天祭)를 지내며 관광객들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제1성은 중국 드라마 ‘건륭황제’와 ‘황제의 딸’을 촬영한 곳으로 유명하다. 성내 곳곳은 자금성 이외의 명·청나라 때 사용하던 성의 모습을 그대로 축소·복원했다. 국제회의실로 사용하는 건물에는 70여개의 크고작은 회의실을 갖추고 있고, 홍콩 샹드리에 호텔을 그대로 옮겨놓은 호텔도 있다. 내성에는 휴양, 관광, 유락, 쇼핑 공간을 갖추고 있다.
 불교문화의 본산답게 호텔 1층에는 로비 대신 사찰이 들어서 있다. 석가모니와 미륵, 아미타불이 나란이 서 있다.
 랑팡시에서 자랑하는 또 다른 볼거리는 ‘동방대학성’(東方大學城)이다. 베이징대학을 비롯해 37개 중국내 대학의 분교나 연구소가 들어서 있는 대학촌으로 현재는 1만평 규모다. 이 대학촌에만 학생이 6만명이 있다.
 현재 2기 공정까지 마친 상태로, 3기 공정이 끝나면 4만평 규모에 15만명이 사는 대규모 대학촌이 된다. 농구장에 대규모 운동장, 숙소, 쇼핑타운 등을 갖추고 있으며, 골프장도 있다.
 ▲피서산장
 천하제1성을 떠난 팸투어단이 다음일정으로 찾은 곳은 청더(承德)시. 여름에도 24도를 넘지 않아 더위를 피하기에 안성마춤이다. 특히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의 배경이 된 ‘피서산장’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베이징과 청더시를 잇는 도로개설공사가 한창인 가운데 일행을 맞이한 것은 극심한 교통정체였다. 왕복2차로 도로에서 5중 추돌사고가 발생, 정체구간만 20여㎞. 외길이라 오도가도 못한 채 3시간 가까이 도로에 갇히고 말았다.
 아침 일찍 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추운 날씨에 이내 함박눈으로 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황제가 여름 무더위를 피해 머문다는 피서산장에서 맞이한 첫눈이었다.
 피서산장은 청나라 강희제가 1703년에 만들기 시작해 87년만인 건륭제 1790년에 그 위용을 드러냈다. 중국 최대 규모의 황실별장이다. 당시 베이징에서 피서산장까지는 한달에 걸친 긴 여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피서산장은 단순한 ‘피서’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천하를 다스린다는 ‘무위이치’(無爲而治)의 뜻이 숨어 있다.
 또한 인근에 소수민족을 위한 종교사원을 축조해 민족 대화합을 도모했다. 군사적으로는 황제가 피서산장에 머물면서 몽고를 견제한, 전초기지 역할도 했다.
 완벽한 원림예술의 결정판으로 평가받고 있는 피서산장은 그 규모만해도 청더시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넓다. 황제가 말을 타고 다녔을 숲(평원구·平原區)이며 산(산구·山區), 배를 타고 유희를 낚았을 호수(수원구·水苑區)는 그 넓이에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이와달리 황실의 거처로 사용했을 궁전구(宮殿區)는 자금성의 권위와 화려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절제와 소박함을 바탕으로 자연미가 물씬 풍긴다.
 피서산장의 비석과 편액은 소수민족을 회유하고 어우르기 위한 방편으로 만주족, 몽고족, 한족, 장족, 위구르족의 언어를 병기하고 있다.
 연암 박지원이 건륭제의 생일을 맞아 이를 축하하며 피서산장에 머물며 쓴 ‘열하일기’의 배경이 바로 피서산장이다. 약소국 조선의 사신 박지원은 궁전구을 지키듯 서 있는 금사자상 앞에서 건륭제에게 ‘삼배구고례’(三拜九叩禮)를 해야했다.
 ▲외팔묘(外八廟)
 피서산장이 갖는 정치·군사적 의미는 외팔묘에서도 잘 드러난다. 수십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인 중국은 ‘중화사상’을 내세우며 천하제일을 자칭하지만 민족간의 갈등이 첨예한 곳이기도 하다.
 때문에 소수민족을 다독거릴 수 있는 융화정책이 필요했다. 강희제는 티벳 지역을 정벌한 후 소수민족을 달래기 위해 그들의 종교를 수용해 피서산장 외곽 8곳에 10여개의 절을 지었다.
 그 중 한 곳이 소포탈라궁이라 불리는 ‘보타종승지묘’다. 외팔묘중 규모가 가장 큰 절로 건륭제 60세 생일에 티벳의 포탈랍궁을 그대로 옮겨놓은듯 티벳식으로 지었다. 대웅전이 있는 사원은 높이만 43m다. 대웅전 지붕에는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지만 건립 당시만해도 황금 400㎏ 녹여 부어 그 화려함이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비석에는 티벳어, 만주어 등 4개 언어로 함께 병기했다.
 인근 보녕사 대불사 또한 티벳식으로 건륭제 20년(1755년)에 건립됐다.
 대웅전에는 중국 최대 목각상이 있다. 불상의 높이만 22.28m, 허리둘레가 15m에 무게는 110톤에 달한다. 소나무와 박달나무, 낙엽송, 배나무 등 5종류의 나무를 깎아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조립했다. 그 규모에 비해 아름답고 섬세한 조각이 돋보인다. 대웅전 안쪽 벽면에는 1천개가 넘는 작은 불상이 가득차 있기도 하다.
 중국내 여행 중 가장 곤혹스런 점이 문과 벽이 없는 화장실인데, 많은 관광객이 찾는 보타종승지묘 또한 그렇다. 허베이성 여유국 관계자는 팸투어단의 이 같은 지적에 “제일 먼저 화장실 부터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김주희기자 kimju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