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이화원과 자금성을 가다
 중국은 ‘벤츠승용차’와 ‘마차’가 뒤엉킨 도시다. ‘톈진’만 해도 그렇다. 자전거와 차량이 어지럽게 뒤섞여 대로를 누비고 다닌다. 그러나 ‘베이징’은 조금 다르다. 거리는 말끔하고 차들은 질서정연히 주행한다. ‘2008 북경올림픽’은 베이징을 그렇듯 말끔한 모습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현지 시각 지난 8월31일 오전 8시15분(한국 시간 오후 9시15분). 숙소인 톈진의 ‘카이터호텔’을 나와 북경으로 향했다. ‘이화원’과 ‘자금성’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두 시간 여를 달렸을까. 오전 11시25분쯤 이화원에 도착했다. ‘청조’시대 황실이 별궁으로 사용한 곳으로, ‘서태후’가 오랫동안 머물렀다. 들어가는 문이 고색창연한 빛깔을 내뿜고 있었다.
 ▲서태후의 별궁 ‘이화원’
 청 왕조 4대 황제인 ‘건륭황제’는 어머니의 6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1750년 이화원을 완성한다. 호수 220만㎡ 대지 70만㎡를 합해 290만㎡의 정원을 꾸미기 위해 건륭은 15년간 전국 수입의 7분의1을 쏟아부었다. 이화원은 그러나 1860년 영·프 연합군의 방화로 소실된다. 이화원을 복건한 사람은 서태후다. ‘수렴청정’의 화신 서태후는 해군의 군함건조비 3천 만냥을 유용해 1888년 이화원을 다시 지었다. 이후 1908년 병사할 때까지 4∼10월을 이 곳에서 보냈다. 말로만 듣던 서태후는 어떤 여인인가.
 서태후의 본명은 ‘예흔나라씨’. 청나라 말기인 1835년 만주 귀족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7살에 수녀(궁녀)로 입궐한다. 그리 미인은 아니었지만 청나라 7대 왕인 ‘함퐁황제’의 아들을 출산하며 황태후로 승격한다. 황제가 죽은 뒤 6살 난 아들 ‘동치’를 황제로 앉힌 28살의 서태후는 이 때부터 수렴청정을 시작해 48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서태후의 식탁엔 늘 60가지 주식에 128가지의 산해진미가 차려졌다. 이 한 끼 식사비는 하루 만 명의 농민이 끼니를 때울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는 매일 밤 산모의 젖을 먹었다.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남자를 매일 갈아치우며 잠자리를 한 뒤 죽이는 바람에 중국에 미남이 없다는 얘기도 있다. 주샹진씨(여·가이드)는 “중국 역사책에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그런 얘기를 들어는 보았다”고 말했다.
 문으로 들어서자 ‘인수전’이 드러난다. 서태후가 정사를 보던 곳이다. ‘인자하게 정치를 베푸는 자는 장수한다’는 뜻처럼 인수전 곳곳에는 목숨 ‘수’(壽)자가 눈에 많이 띈다. 조금 더 들어가니 ‘옥란당’의 모습이 보인다. 원래 건륭황제가 사무를 보던 옥란당은 나중에 광서황제를 10년간 가둔 장소로 바뀐다. 벽은 두껍고 견고하다. 광서황제는 서태후의 여동생과 시동생이 낳은 아들. 서태후는 아들 동치황제가 죽자 4살 밖에 안되는 광서를 황제로 앉히고 계속 실권을 장악했다.
 이어 광서의 황후 융유가 살던 ‘이운관’과 서태후가 식사를 하던 ‘낙수당’을 지나자 두 사람 정도만이 간신히 지날 수 있는 복도가 기다리고 있다. 서태후가 비나 햇살을 피해 불공을 드리러 가던 복도 ‘장랑’이다. 길이 728m의 장랑은 중국 정원 건축 가운데 가장 긴 건축물이다. 천정엔 견우직녀, 삼국지, 산수화 등 8천 폭의 제각기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때문에 장랑의 별칭을 ‘화랑’이라고도 한다. 복도를 따라 한 걸음 두 걸음 내딛다 보니 황제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천천히 걸으며 왼 쪽을 바라보니 카키색의 거대한 호수가 햇살을 받아 물비늘을 반짝인다. 오른 쪽은 숲이 울창한 산이 솟아 있다. 왼 쪽은 인공호수인 ‘곤명호’이고 오른 쪽은 곤명호 자리에 있던 흙으로 쌓은 ‘만수산’(해발 108m)이다. 장랑의 끝은 ‘배운문’으로 통하며 안으로 들어가면 ‘배운전’과 ‘불향각’을 만날 수 있다. 배운전은 서태후가 생일 때 백관의 조례를 받았던 곳이고, 불향각은 불공을 드리던 장소다. 100개 계단의 석조 위에 놓인 불향각은 높이 41m로 4중 겹처마 건물. 안 쪽은 8개의 두레밤나무 기둥으로 돼 있으며 키 7.5m 무게 207t의 천수관세음보살을 만날 수 있다.
 ‘남문’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 물끄러미 곤명호를 바라봤다. 이 광활한 호수의 밑바닥엔 무수한 사람의 피와 땀이 두텁게 침적해 있으리라. 남문으로 가까이 갈수록 만수산이 멀어진다.
 ▲천자의 성 ‘자금성’
 이화원 앞 한국식당인 ‘산정루’에서 점심을 먹고 ‘천안문광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30분. 천안문은 다름 아닌 ‘자금성’의 첫 번 째 관문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1989년 천안문사태, 파룬궁사태를 머금은 천안문 광장은 중국 대륙만큼이나 넓은 또하나의 ‘중원’이었다. 천안문 한 가운데엔 모택동 초상화가 붙어 있고 왼 쪽과 오른 쪽에 각각 ‘중화인민공화국만세’ ‘세계인민대단결만세’란 표어가 눈에 들어왔다.
 자금성은 명왕조 영락 4년(1406)에 짓기 시작해 영락 18년(1420) 완공됐다. 58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자금성은 1911년 청왕조 마지막 황제 부의까지 명왕조 14명, 청황조 10명의 황제가 봉건 황제의 최고 권력을 행사하던 곳이다.
 자금성은 장방형의 성지로 높이 10m, 길이 3천428m의 성벽이다. 자금성의 첫 번째 문을 지나 끝으로 나올 때까지 두 시간은 족히 걸리니 이 성의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0만 명의 공장과 100만명의 역부가 동원돼 지은 자금성은 모두 9천999칸의 방이 있었지만 지금은 8천700여 칸만 보존된 상태다. 이는 당시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는 궁궐이 1만 칸의 방을 갖고 있었으므로, 천자는 그보다 하나 모자라는 칸수를 짓기 위해서였다고 전한다.
 천안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오문’이 나온다. 자금성에서 가장 큰 문이다. 과거 중국의 황제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들이 포로들을 잡아 돌아올 때쯤이면 오문으로 친히 나와 상을 내렸다고 한다. 전리품을 지닌 장수처럼 오문을 지나 ‘내수금교’에 닿았다. 내수금교의 중앙은 황제만 다닐 수 있었고 그 양 쪽은 친속·왕공·대신들이, 그 바깥 쪽은 3품급 관직을 가진 사람만이 지날 수 있었다. 내수금교를 지나 ‘태화문’으로 들어서자 금빛으로 빛나는 사자 한 쌍이 눈을 부라린다. 중국에선 사자를 수호신으로 모시는 데 권력과 존엄을 상징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1시간 여쯤 지났을까. 양 옆은 제대로 구경도 하지 못하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데도 문은 끝없이 나타난다. 이제 ‘태화전’을 만난다.
 태화전은 자금성에서 가장 큰 고궁으로 ‘금란전’이라고도 한다. 24명의 황제가 이 곳에서 등극했고 황제생일, 황후측립, 법령·정령을 반포하던 곳이다. 또 장군을 출정시키고 문무백관의 조례를 받는 등 황실 내 모든 주요 행사를 거행하던 곳이다. 이곳은 영화 ‘마지막 황제’를 촬영한 장소이기도 하다. 서태후가 죽은 뒤 1908년 12월2일 세 살배기 ‘부의’가 황제에 오른다. 태화전을 뚫어지게 바라보니 슬프고도 귀여운 황제 부의의 모습의 영상처럼 오버랩됐다.
 이어 황제가 쉬거나 신하의 축사를 받던 ‘중화전’과 연회를 베풀던 ‘보화전’, 황제의 침실이자 평상시 정사를 처리하던 ‘건청궁’을 지난다. 또 황후의 생일잔치를 하던 ‘교태전’, 황후의 침실인 ‘곤녕궁’, 가장 오래된 화원인 ‘어화원’ ‘천일문’ 등을 지나 자금성을 빠져 나오자 높이 14m의 퇴수산이 기자 일행을 맞는다. 다리는 좀 아프지만, 붉은 벽돌과 황금빛 지붕의 이미지가 선연하다.
 갑자기 몇 몇 노인이 푸대자루를 들이밀었다. 페트병을 모으는 사람들이다.
 베이징의 대표적 도매시장인 ‘홍교시장’으로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 데 악세사리, 가방 등을 파는 장사꾼들이 벌 떼처럼 달라붙는다. 가격은 싸지만 대체로 조잡하다. 먼 옛날에도, 으리으리한 황궁 뒷 문 주변엔 서민들이 서성대고 있었을까./베이징=글·사진 김진국기자 freebird@incheo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