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는 자와 쫓기는 자(42)

 개인의 상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해 내각결정 140호를 발표하면서 그 대안으로 국영상점과 협동단체 상업망을 통해 생활필수품을 구입해 쓰도록 법으로 정했는데 그 대안으로 설치해 놓은 국영상점과 협동단체 상업망들이 공업적 제품과 포장해서 유통 가능한 상품만 취급이 가능할 뿐 상표를 부칠수 없는 농산물과 그밖의 물자는 인민들이 요구해도 공급할수 없는 품목이 많았다. 인민들이 요구하는 그 많은 품목들을 당시의 국영상점과 협동단체 상업망은 공급해 줄 역량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권력 수뇌부에 있었던 당기관과 행정기관의 간부들은 시간이 흐르면 국영상점과 협동단체 상업망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므로 국영상점과 협동단체 상업망이 미처 구비하지 못했던 채소류와 빗자루 같은 가내수공업 제품들은 당에서 열어주는 시장에서 구입해서 생활하라 하면서 1개 군 단위마다 두어 군데 자리를 정해 한 달에 세 번씩 장을 열었다. 이것이 농민시장이라는 것인데 일부 인민들은 이 시장이 한 달에 세 번 열린다고 3일시장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았다.

 농민시장에서는 쌀이나 보리 같은 곡물류와 공산품류는 원칙적으로 거래를 못하게끔 법으로 금지시켰다. 그리고 안전원을 내보내 단속했다. 그러자 한동안 사라졌던 암거래가 다시 성행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 해결할 것으로 낙관했던 국영상점과 협동단체 상업망들이 인민들이 필요로 하는 생활필수품을 적기에 공급하지 못한 것이 주원인이었다. 또 다시 인민들의 원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고통을 참다못한 인민들은 임시 방편으로 사람이 모이는 장소나 공터에 교환할 물건을 가지고 나갔다. 그리고 국영상점과 협동단체 상업망이 공급하지 못하는 상품과 물자들을 찾아 물물교환 형태로 거래하면서 일상적 삶을 이어 나갔다.

 이렇게 해서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장마당이라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농민시장이 설치되지 않은 지역의 도로 주변이나 하천변, 그 외의 공터에서 난전 형태로 자연스럽게 열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한 달에 세 번씩 열리는 농민시장과는 달리 매일 열렸다. 자식들 혼인을 시킨다거나 초상을 당했을 때 인민들은 국영상점이나 협동단체 상업망을 찾아가 큰일에 쓸 상품과 물자를 찾았다. 하지만 국영상점이나 협동단체 상업망에는 없는 물건이 너무 많았다. 궁여지책으로 인민들이 많이 모이는 례성강 나루터 같은 곳으로 나가 『딸아이 시집보내려고 하는데 이불감이나 옷감 가지고 있으면 우리 집 흑백 텔레비전하고 교환합시다. 혼사 날짜는 다가오고 급해서 그럽습네다…』하면서 대상자를 찾아다니다 옷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정 아바이도 둘째 딸아이를 시집 보낼 때는 이런 식으로 혼수를 마련해 큰일을 치렀다.

 인민들에게 이런 편리함을 안겨준 장마당은 시간이 흐를수록 번창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