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는 자와 쫓기는 자(35)

 인근 례성강 건너편 배천군에 자리잡고 있는 「9호농장」에서는 남새류(야채류)와 과일류를 주로 생산했다. 그 남새류와 과일류들은 평부선 「965화물」 편으로 평양시 용성구역에 있는 호위총국 1호창고로 집결되었다.

 배추ㆍ무ㆍ부루(상추)ㆍ고추ㆍ오이ㆍ토마토 등의 남새류는 온천수로 난방하는 유리온실에서 재배했고, 고구마ㆍ감자ㆍ콩과 같은 뿌리작물들은 깊은 산의 부식토를 밑거름으로 사용해 재배했다. 농약이나 인분, 화학비료 등은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사과ㆍ배ㆍ복숭아ㆍ포도 등의 과일류는 당도를 높이기 위해 깻묵ㆍ설탕ㆍ구육(개고기) 등을 함께 띄워 거름으로 사용했다.

 이런 남새와 과일들은 9호농장 호위총국에서 파견된 지역 책임자의 지도 아래 관리되었다.

 호위총국 지역책임자는 기초과학연구원의 연구원, 해당 구역 초급당비서, 담당 부기부원, 농장관리 호위총국요원 등을 9호농장에 상주시키며, 1호식품의 생산시기ㆍ생산량ㆍ품질검사ㆍ포장ㆍ탁송은 물론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일상생활까지 지도 감독했다.

 9호노동자들은 대부분 토대(출신성분)가 좋고 건강했다. 몸에 감기ㆍ두드러기ㆍ다래끼 같은 질병이 생겨도 작업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이들은 분기마다 신체검사를 받았고, 일상생활이 흐트러지고 충성심이 결여되면 일반협동농장이나 농사 관계 단위 사업소 노동자로 전직시켰다.

 일반노동자들이 부러워 할 만큼 대우도 후하게 해주었다. 비당원일 경우는 우선적으로 입당시켜 주었다. 보수는 일반노동자들이 받는 월 노임의 2배(150원)를 지급했다. 거기다 호위사업비 20원과 비밀엄수 가급금 20원을 더 얹어 주었다. 또 충성심과 자긍심을 고양시키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평양 견학을 시켜 주었다.

 림복순 부기원은 해주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그곳에서 유치원과 인민학교, 그리고 고등중학교를 마치고 해주농업대학 경제식품학과에 입학해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그녀는 만수무강연구소 연구조수로 배치되었다. 평양시 대성구역 미산동 문덕거리 인민무력부 보위국 청사 맞은 편에 있는 이 연구소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재정경리부 산하에 소속되어 있었다. 주임무는 김일성 수령의 만수무강을 도모하는 사업을 주도했다. 그러다 림복순 부기원이 박창근 연구원과 결혼했던 지난 1978년 이 만수무강연구소는 기초과학연구원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이때부터 이 연구원은 당중앙(김정일)의 건강과 장수를 도모하는 사업을 전담하게 되었는데, 그녀와 남편은 야채와 과일재배 연구를 주로 하는 제4연구실에 배속되어 있었다.

 거기서 두 사람은 2년 정도 복무했다. 림복순 부기원은 주로 남편인 박창근 연구원을 돕는 연구조수로 일했다. 그러다 두 사림은 배천군에 있는 9호농장으로 파견되었다.

 거기서 림복순 부기원은 큰딸 은별이를 낳았다. 그해 10월 평양에서는 6차 당대회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