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은 미지의 세계를, 혹은 새로운 꿈을 향한 ‘도전’이다.
도전하는 이들은 한 자리에 머무르길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봉우리 하나를 오르면 또 다른 봉우리를 찾아 떠난다.
‘운동권 학생-만화가-환경운동가-농사꾼…’. 박흥렬(41),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만화가를 꿈꾸었던 그는 어른이 되서 시사만화가의 꿈을 이뤘다.
그러나 그 과정이 만화공부를 체계적으로 해 이뤄진 것은 아니다.
그는 민주화 열망이 물결쳤던 80년대 초반엔 운동권 학생으로 데모대를 떠나지 않았고 졸업 뒤에는 시사만화가로 펜을 잡으면서도 환경운동에 뛰어들어 현장을 누볐다.
신문사에선 날카로운 터치로 부조리한 사회를 적나라하게 그려내는 만화가로, 환경단체에선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1인2역의 삶을 살아온 셈이다.
그런 그가 3년전 느닷없이 강화로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은 아내 김남순(41)씨와 함께 하점면에서 1천여평의 배밭을 일구고 있다. 
지난 5일 오후 1시. 강화대교를 건너 지석묘 쪽으로 가다보면 강화군 하점면 이강리가 눈에 들어온다. 2차선 도로에서 기다리던 박흥렬씨가 손을 흔든다. 건강함이 배어나오는, 구리빛으로 살짝 그을린 얼굴이 영락없는 농사꾼이다. 그를 따라 밭쪽으로 100m쯤 들어가자 1천여평의 배밭이 나온다. 배밭에는 아내 김남순씨가 배를 솎고 있었다.
“지금이 배솎기 끝단계라고 보면 됩니다. 이제 곧 봉지로 열매를 싸야 합니다.” 박씨에 따르면 배농사는 가을철 수확이 끝난 뒤 곧바로 시작된다. 추수 뒤 한 차례 거름을 주고 본격적인 농사를 시작하기 전인 2월께 한 차례 더 거름을 줘야 한다. 이 때 가지를 잘라주는 전지작업이 함께 이뤄진다. 이어 4월엔 배꽃솎기·가지잡아주기, 5월 열매솎기, 6월에 봉지싸기가 끝나면 9월에 바삭바삭하고 달콤한 배맛을 볼 수 있다.
“아침 7시부터 해질녘까지 쉴 틈이 없어요. 갓난아이 돌보듯이 신경을 써야 한다니까요.” 박씨는 “농사가 이렇게 힘든 것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며 “막걸리 없이는 여기서 일 못한다”는 핑계로 막걸리 한 사발을 쭉 들이켠다.
사실 그에게 농사가 어려운 것은 처음 하는 일이어서가 아니다.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법으로 경작을 하기 때문이다.
“농약 치는 거 보면 장난이 아닙니다. 수십가지에 이르지요. 배는 자기 몸에서 나는 것들로 거름을 삼는 게 가장 좋습니다.”
박씨는 농약 대신에 배나무를 솎을 때 모아둔 열매나 잎으로 거름을 삼는다. 한 나무에서 열매의 10분의 9는 쳐 내야 하는 것이니 거름은 충분하다. 병충해 방지는 식초를 물에 타서 주는 정도로 끝낸다. 그러니 아무래도 손이 많이 갈 수밖에 없다.
그를 농촌으로 끌어들인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문득, 아이들이 너무 규격화된 생활 속에서 획일적으로 자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게 너무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박씨가 10여년간 살아온 아파트를 팽개치고 강화에 들어온 이유는 ‘전원생활의 낭만’을 만끽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느 여름 날 집에 돌아왔는데 아이들이 똑같은 거실에서 똑같은 위치의 소파에 앉아 똑같은 방향에 놓인 TV를 보고 있더라는 것이다. 열린 베란다를 통해 역시 베란다문을 열어 놓은 다른 가정을 보았다. 그 풍경은 다른 모든 가정도 거짓말처럼 똑같았다. 박씨는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이건 아닌데….
“아이들에게 풀과 나무, 흙이 있는 곳에서 자랄 수 있는 권리를 줘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아내도 흔쾌히 동의를 해주었지요.”
그렇게 박씨 가족은 2000년에 시골로 주거지를 옮겼다. 하점초등학교에 다니는 큰 아들 규홍(13)이와 작은 아들 규창(10)이는 다행히 불평불만없이 시골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 규홍이는 학교에서 전교회장을 맡아 활약하는 등 도시에서보다 더 활기찬 모습이다.
“농촌에서 살려면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전원주택을 짓고 살더라도 하다못해 텃밭이라도 가꿔야 한다”며 “주민들과 한데 어우러질 때 진정으로 전원생활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고 말한다.
박씨가 겁도 없이 농사를 시작한 것은 지난 95년부터 5년간 가톨릭 ‘우리농촌살리기 운동본부’ 환경분과위원장을 맡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아내 김씨가 지난해 ‘강화도 환경농업 농민회’가 마련한 귀농프로그램을 6개월간 교육받은 것도 큰 힘이 됐다.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사회·환경단체 일을 맡아온 그는 현재 가톨릭환경연대 집행위원장일도 보고 있다. 또 여전히 각종 잡지와 신문에 그의 본업인 만화를 그리고 있다. 박씨는 1993년부터 10여년간 인천일보 만평과 4컷만화의 화백이기도 했다.
“생명 생명 외쳤지만 사실 저에게 지금까진 구름잡는 얘기였다는 생각입니다. 이제 뭐 좀 감이 잡히는 것 같습니다.”
‘고인 물’이 아닌 ‘흐르는 물’과 같은 생을 살아온 ‘박화백’. 배를 솎는 그의 부지런한 손놀림에서 ‘생명’과 ‘환경’에 대한 ‘사랑’이 진하게 묻어났다. <글·사진=김진국기자> freebird@incheo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