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도로 잔인하고 악랄해지는 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길이며 멋지게 싸우다 값지게 죽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기는 사람들.
요즘 신세대들에겐 먼나라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30여년전 그 곳의 젊은 청춘들은 정말 그랬다.
인천 잠진항에서 카페리를 타고 20분이면 도착하는 섬 실미도.
얼마전까지만해도 대무의도와 무리를 이루고 있는 작은 무인도 정도로 여겨지던 이곳이지만 이젠 30여년 숨겨진 그 참혹했던 핏빛 역사들을 스스로 걷어 올리며 조심스럽게 홀로서기를 준비 중이다.
잠진항에서 큰무리선착장 오른편 항로로 방향을 돌리면 코앞으로 보이는 곳이 실미도. 잔잔한 수면위로 초입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천혜의 자연에 조용하다 못해 섬뜩하게 느껴지는 기암괴석들. 그 너머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부대막사와 훈련시설들. 바로 영화 ‘실미도’의 촬영 현장이다.
이 곳은 이미 지난 4월30일 투자와 제작을 맏은 강우석 감독을 비롯한 출연배우와 스태프 등 300여 명의 관계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제작고사 및 추모제 행사를 가졌던 터라 이젠 꽤 입소문이 난 상태.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30여년 전 상황과는 달리 요즘은 실미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안다는 얘기다.
배우와 스탭들이 무의도의 한 펜션에서 숙식하며 40%가량의 촬영을 마친 상태인 영화 ‘실미도’는 요원들이 실미도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선상폭동 장면을 시작으로 각종 훈련과 내무반 생활 등의 촬영과 함께 지금은 2주간의 야간촬영에 들어갔다.
세트장도 처음으로 공개되던 40여일 전과는 달리 로프로 연결된 유격장 V자계곡 아래편에 촬영을 위한 안전시설이 마련되는 등 여러모로 보강된 상태.
3개월간 초기 순제작비만 15억원을 투입해 만들어진 이 세트장은 영화의 드라마적인 부분을 살리려고 철저한 고증과 현장답사를 거쳐 훈련소가 있었던 자리에 실제와 똑같이 만들어 졌다는 점이 특징.
당시 유일한 기간병 생존자인 실미도동지회 관계자 등과 함께 현장 답사하며 발견한 주춧돌과 막사터 등을 최대한 살려 제작된 세트장인 셈이다.
특히 배를 댈 만한 부두 하나 없는데다 하루 두 차례만 접안이 가능한 무인도에다 세트장을 설치하다 보니 어려움이 많았다는 게 헌팅에서부터 세트제작까지를 맏았던 미술팀들의 얘기다.
더군다나 예상 밖의 악천후와 자연을 최대한 훼손시키지 않는 상태에서 세트장을 지으려다 보니 어려운 작업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것.
실면적 8천여평에 훈련병 막사는 물론이고 기간병과 통신장교의 막사, 그리고 통신대, 탄약고, 유격장에 군데군데 설치된 초소까지 언듯 보기에도 실제 훈련소와 다름이 없다.
또 막사 안에 있는 부대 현황판에는 1968년 당시의 날씨와 일출과 일몰시간, 그리고 당직사령과 경계근무조 명단까지 꼼꼼하게 적혀 있다.
그러나 실제로 촬영은 세트장 후면과 섬 요소요소에 부분적으로 만들어 놓은 간이세트장에서 함께 진행될 예정이다 보니 섬전체가 세트장이나 다름없다는 것.
한국 근대사의 치부로 여겨지며 역사속에서 조차도 없어져야 할 섬으로 남을 뻔 했던 실미도가 2003년 한편의 영화를 통해 진실의 색깔로 복원된 것이다.
실미도 사건은 주석궁 폭파를 목적으로 창설된 특수부대원들이 1971년 훈련 중이던 실미도를 탈출해 청와대로 총부리를 겨눈 사건.
이들은 1968년 북한 124군 부대가 청와대를 급습했던 일명 김신조 사건에 보복하기 위해 만든 특수부대로 지옥 같은 훈련을 받아오던 중 북파직전에 작전이 취소되고 부대해체 소식이 전해지자 단체로 부대를 이탈한다.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로 향하던 중 포위공격을 받고 일부는 수류탄으로 자폭하고 나머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연고자가 없는 사형수와 무기수, 그리고 전과자 등으로 구성된 31명의 젊은 청춘들이 인간 병기로 다듬어지던 그 역사의 현장이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되살려진 것.
촬영일정이 다소 늦어진 데다 인파가 몰리는 여름휴가철이 겹쳐 8월까지 겨울장면을 제외한 모든 촬영일정을 마치고 1차로 철수할 예정이다.
제작팀의 윤종호씨는 “아픈 역사의 현장에 세트장을 설치하고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려다보니 예상치 않은 많은 외부적인 어려움에 접하고 있다”며 “한편의 흥행영화가 아닌 우리의 역사를 진실되게 파헤쳐 간다는 생각으로 지역의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초기 순제작비를 포함해 모두 30억원 가까운 시설비가 투입된 이 대규모 세트장은 사유지를 임대해 사용하고 있는데다 여러 가지 법적인 절차가 남아 있어 촬영 후 어떤 모습으로 일반에게 공개될 지는 아직 미지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글 이원구·사진 김성중기자> jjlwk@incheo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