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제를 ‘새와 풀’이라 옮겨 봤자 퀴즈 같기는 매일반이다. 그렇다면 ‘철새와 잡초’는 어떨까? 저간의 세태를 읽는데 이 만한 코드가 쉽지 않기에 연결하는 실마리다.
 흔히 정가의 입담에 오르내리는 ‘철새’란 지조 없음을 빗대는 어법이다. 졸지에 소신 없이 기웃거리는 무리와 한통속이 된 철새로선 여간 불쾌하고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철새는 거동과 때매김이 분명해 함부로 근거지를 바꾸지 않는다. 철새는 목표설정이 분명한 리더만을 뒤쫓는다. 뿐만 아니라 뜬 자리가 어지럽지 않는 덕목을 지녔을진대 마땅히 이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터인데도 잘못 인용이 여전하니 탈이다.
 굳이 의리 없는 날짐승을 꼽자면 뻐꾸기가 제격이다. 그윽한 울음소리를 통해 목가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인상과는 달리 자세히 살피면 겉과 속이 딴판이니 말이다. 뻐꾸기는 5월 산란기면 저보다 몸집이 작은 새 둥지에 몰래 알을 낳는 고약한 버릇을 지녔단다. 이를 눈치 채지 못한 멧새 종달새는 무단침입자에 온갖 정성을 쏟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양어미 울음소리를 가장해 먹이를 갑절 가로채고 끝내는 진짜 ‘주인 자식’마저 둥지 밖으로 밀어내니 이보다 배은망덕한 새가 어디 있겠는가.
 따라서 겉치레와는 달리 속마음에 교활·악덕을 품은 인간형이야말로 ‘철새’ 어법에서 ‘뻐꾸기 인간’으로 대체해 봄직하다는 것이다. ‘철새’ 타령과 아우르게 ‘잡초’를 거론하는 까닭은 익히 알다시피 노무현 대통령이 e메일서 던진 ‘잡초정치인’ 언급파장이 쉽게 가라앉지 않기 때문이다.
 잡초(포아풀)는 우리 주변은 물론 세계도처에 자생하는 벼과(科) 잡풀이기에 철새만큼 잘못 평가받는 대상이다. 고작 높이 5cm에 불과한 사막의 포아풀의 경우 뿌리가 수십m에 이르러 가뭄과 척박한 토양서 살아 남는 생명력을 지녔으니 잡초라 업신여길 대상이 아니다.
 하기야 노 대통령 발언은 사이비 정치인을 상징적으로 지목한 것이기는 하나 자칫 인용이 적절치 못하면 ‘철새’론 처럼 본말이 전도된 역효과를 낳을 소지 없지 않는 보기다. 벌써부터 진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정치권 일각에선 저들 입맛대로 아전인수격 잡초공방이 수그러 들지 않고 있으니 그들이야말로 권력풍향에 좌지우지하는 아첨의 무리라 할 것이다.
 노 대통령이 집권초기에 보인 파격적 노사관과 대미관으로 말미암아 뒷날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오는 작금의 사태를 직시할 때 책임 있는 자리에 설수록 말의 순화가 거듭 통감된다. 폐 일언하고 잡초란 쓸모 없는 잡것으로 인식하기 쉬우나 이는 잡(雜)이라는 말이 던지는 인식의 오류이기에 남을 잡것으로 보면 필경 자기도 잡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월난전쟁 고엽제 후유증은 설명의 여지없고 오히려 잡다한 자연기능을 온전히 살리는 유기농법이 일깨우는 교훈은 잡초와의 공존이 상생의 정치와 일맥상통한다는 화합이치다.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자라나는 ‘풀뿌리 민주주의’는 바로 잡초인생이 일군 과실이다. 오늘 날 참여정부에 많은 운동권 출신이 포진하고 있거니와 따지고 보면 줄기찬 포아풀 닮은 잡초근성에서 비롯한 성취나 다름없음을 되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점을 감안할 때 ‘제 눈의 안경’이라 이해관계에 맞는 잣대로 독초니 약초니 재단하는 것은 그야말로 독선의 소지가 없지 않기에 지도층의 신중한 행보가 거듭 기대되는 이유다. 무릇 낯두꺼운 ‘뻐꾸기 인간’을 외면한 채 오직 ‘철새와 잡초’의 말장난에 날 가는 줄 모르면 당면한 현안을 언제 마무리 할 것인가 걱정 가라앉을 날이 없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야~”. 나훈아의 구성진 노래를 떠올릴 것도 없이 잡초인생이 건재하기에 나라가 이만큼이나마 버텨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