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라 퐁텐의 우화시(寓話詩)에 이런 대목이 보인다. 어린 양이 개천에서 목을 추기는데 때마침 늑대가 지나다 느닷없이 물을 흐려 놓으며 시비를 건다. 겁에 질려 아래쪽에서 마시려 하자 이번에는 지난해 왜 나를 욕했냐고 생떼를 쓰는 것이 아닌가. 어린양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내가 어찌 그랬겠느냐 해명했으나 늑대는 아니면 네 형일 것이라며 끝내 잡아먹었단다.
 이야기는 봉건시대 무소불위의 권력을 풍자한 아이러니가 담겨 있으나 시대는 바뀌어도 “가장 강한 자의 주장이 가장 정당하다”는 억지논리는 지금도 살아 굼틀거린다. 아닌게 아니라 이라크전쟁을 보는 일부시각에 비친 부시의 언행은 늑대와 견주는데 서슴없으리라. 대량살상 무기를 지닌 적이 없다고 극구 변명한데다 주변국마저 그토록 말렸는데 람보 식으로 몰아붙인 저간의 행적이야말로 강자의 논리가 아니냐는 성토다.
 물론 이로 인한 후세인 처지가 딱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그로 하여금 선듯 철부지 어린양에 견주기도 어렵다. 그도 한 때 중동의 ‘강한 자’로 자처해 쿠웨이트 침공(1990.8 )등 비인도적 행위를 일 삼았던 점을 감안하면 명분이 궁색하기는 피장파장이다. 최고통치자의 독선과 상극으로 말미암은 시행착오는 왕년의 에덴동산으로 기록된 문명의 발상지가 쑥밭 되었을 뿐 아니라 이어 혈육 잃은 피맺힌 울부짖음이 그치지 않고 있다.
 무릇 전쟁을 통한 필연적 인명손실을 단지 통계수치로 치부해 넘길 수 없는 까닭이 한 번뿐인 인생을 소중히 꿈 키워 살고자 최선을 다한 인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지에서 건져낸 제시카·린치 일병 구출성공에 미국시민이 열광하는 심정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기에 미사일 파편에 팔다리 찢겨 눈물도 닦지 못하는 이라크 어린이의 고통에 마음 쓰려 하지 않는다면 인도주의란 말짱 헛소리나 다름 아니라는 항변이다. 부시와 후세인은 평소 각기 저들의 신을 신봉하며 정의로운 행동을 강조해온 위인들이다. 사리가 그럴진댄 모름지기 상대로 하여금 보복에 앞서 선의로서 적대감을 희석시킬 대화의 장이 필요했건만 이미 엎지른 물이니 이를 말한들 무엇하랴.
 어찌되었건 이라크사태는 미국 측의 일방 게임으로 끝나가고 있다. 이에 반문하건대 과연 그것으로 인류에게 평화가 돌아 왔다고 기뻐하겠는가? 불행히도 대답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큰 전쟁의 발발주기는 15년이라 하거니와 실제는 불확실시대에선 언제나 재발할 개연성을 부인키 어려워 예측불허의 이상기류가 도처에 흐르고 있는 작금이다.
 한편으로 바그다드 융단폭격에 소요된 전비만을 셈해도 자그마치 1조 2500억 원이라 하던데 나로라 하는 군수산업체가 이 노다지 광맥을 보고 무심히 넘길 리 만무하지 않는가. 더욱이 상처뿐인 해방의 아픔을 뒷전에 두고 벌써부터 반전을 역설하던 열강조차 전후복구 잿밥 챙기기에 혈안이니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찾기란 연목구어라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 주변 역학관계는 이른바 ‘바그다드 효과’를 통해 북한은 물론 참여정권에 외면할 수 없는 반면교사로 다가서 잠시도 방심할 수 없다.
 외세에 놀아나기 어굴 하면 출세하라는 뜻의 일본속담이 있다.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는다면 한국이 살아 남을 길은 오직 남이 넘보지 못할 힘의 비축에 있음을 통감해야 한다. 문득 떠오르는 대목은 개인의지가 타의에 밀려 고뇌하는 주인공의 삶을 다룬 헤밍웨이 작품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이니 방금 누구나 회의를 떨칠 수 없는 상황에 있음에서야. 어제 오늘도 우리 주변에선 각양각색의 종이 ‘제 목소리’를 낸다. 정의를 위한다지만 과연 무엇을 위하고 진정 누구를 위한 것인지 오히려 혼란만을 가중시키는 중구난방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