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검사스럽구나
 삶이 버거운 탓일까, 같지 않는 말이 판을 친다. 맞닥뜨린 처지를 전 같으면 팔자로 체념했으련만 지금은 그게 아니다. 마음에 박힌 것 다 털어야 직성 풀린다는 세상에 그나마 밤낮으로 사이버 공간마저 열렸으니 표현이 기상천외하고 천방지축 일수밖에.
 보기 하여 얼마 전 대통령과 검사간 토론 뒤 나돌기 시작한 “검사스럽다”는 익살 또한 그런 표본의 일각이리라. 당시 거침없었던 대화장면으로 미루어 볼진댄 아마도 “아버지인 대통령에게 대드는 것은 건방지다”는 비유로 헤아려지니 일견 절묘하다. 허나 거품처럼 일고 사라지는 일과성 신조어라 할지라도 때로 가볍게 웃어 넘기에는 가시가 있기에 저간의 사정을 주목하는 까닭이다.
 이르기를 “말로 전하는 것은 듣는 사람들이 똑 같이 듣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뒤집어 말하면 하찮은 유행어일지라도 풀이에 따라 역설적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아닌게 아니라 건방지다는 뜻풀이가 “젠체하며 주제넘은 태도”임을 일컫는 것일진댄 비단 물의의 대상이 한 쪽에만 치우칠 수 없다는 암시가 담겨 있다. 여차한 검찰 조직개편을 둘러싼 이견은 참여정부의 개혁의지에 제동을 걸고자 함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국적 판단과 시행에 유연성을 지녀달라는 당부로 풀이해 봄직 하다.
 논란의 초점인 ‘정치검사’를 보기 할지라도 엄밀히 따지면 이를 부추기는 정치권 없이 가능했겠는가 하는 반문이 나선다. 따라서 평 검사의 ‘돌출행위’만을 나무랄 것이 아니라 제 손 안에 꽉 잡고 흔들려는 일부세력의 저의 또한 자중해 마땅하다는 의견이다.
 방금 개혁의 이름 아래 원인행위의 규명 없이 일도양단 하는 이분법적 논리가 상호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있거니와 내외정국은 냉소적 분위기에 무관심할 만큼 태평치 않다. 언 듯 보기에도 한·미간의 균열, 세대간의 반목, 노사간의 갈등, 진보 보수의 대립 등 나라 안 현안만도 일일이 셈하기 번거로워 어지럽다.
 특히 거듭되는 비방에 밀려 정당한 반론조차 편가르기로 몰리는 현실을 바로 잡을 어른스러운 아량과 포용의 길잡이는 아무래도 집권세력의 몫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대통령을 아버지 반열에 올리는 것도 억질 뿐더러 ‘국민이 대통령’이라는 구호 역시 ‘검사스럽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스스로 무소불위의 처지로 여긴다면 쓴 소리가 건방지게 들릴 것이고 국민을 대통령으로 부추기면 남을 업신여기기 쉬운 것이 인심이다.
 일견 발전을 요약하는 정보와 속도 면에서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다고 자부해 온 작금에 찬물을 끼얹은 대구지하철사태의 교훈은 겉은 멀쩡해도 속 빈 탕임을 깨우치는 대목이다. 이렇듯 고뇌하는 시기에 저들이 백번 자숙해 마땅할 북한당국마저 혼란에 편승해 이간질을 꾀하고 있으니 그들의 행태야말로 시쳇말로 검사스럽기 그지없다.
 앞서도 말했거니와 신조어란 이를 낳게 하는 시대적 배경에 민감하다. 때문에 저간의 파격정치가 그러한 화제를 불러일으킨 온상이라면 이를 보완하는 것이 소멸의 첩경일 것이다. 모름지기 국민 절대다수에 기여할 정치란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지켜야 할 상식과 합리적 가치”에 있다 할 것이니 이는 지나친 파격행위에 대한 또 다른 목소리다. 강한 정치 보다 친근한 정치가 국민과의 거리감을 좁힌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어울리는 부드러운 트레이드마크이가 바로 이러한 온유한 성품에 바탕 해야 세상이 덜 피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