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경신 천기독병원 원목실장∙로제타 홀 기념관 관장
▲ 강경신 로제타 홀 기념관 관장∙인천기독병원 원목실장

우리나라는 매년 4월7일을 국민 보건 향상을 강조하기 위해 '보건의 날'로 기념한다. 이날은 보건복지부가 행사 주최 기관으로 건강 관련 중점과제를 선정하고 보건사업 유공자에 대해 포상을 시행한다.

보건의 날이 52돌이 되기까지 수많은 분이 보건 유공자로 국가 훈장을 받았다. 우리는 이분들의 삶을 통해 애국애족, 박애, 헌신, 사랑 등을 배운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위해 공헌한 사실이 분명하고, 훈장추서를 통해 삶과 정신을 꼭 기려야 할 분으로, 올해에는 꼭 훈장을 받았으면 하는 한 분을 소개하고 싶다.

바로 'Dr.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다. 이분은 미국감리교회 여선교회가 조선에 파송해 준 의료인으로 25살에 조선에 와서 43년을 살며, 조선의 가난한 여인, 어린이, 장애인을 위해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하는 일에 헌신했다. Dr. 로제타 홀은 1890년 10월, 서울 도착 다음 날부터 당시의 여성병원이었던 '보구녀관'에서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는데, 11월에는 4년 전 화상을 입어 손가락이 굽은 소녀를 치료하였다. 치료 중 피부이식이 필요하였는데, 환자와의 소통의 문제로 환자의 몸에서 피부를 떼어 환부에 이식하는 것이 어렵게 되자, 로제타 홀은 자기 피부를 떼어 소녀의 손가락에 이식했다. 소녀는 완치되었고, 이런 로제타 홀의 헌신적인 모습을 알게 된 조선 여인들은 로제타 홀의 진료를 무한히 신뢰하기 시작했다.

로제타 홀은 평양에서는 '평양부인병원'을 열어 환자를 치료하였고, 조선말에 맞는 점자를 최초로 개발하여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일은 맹아학교와 농아학교의 개교로 이어졌다. 로제타 홀의 맹아학교 학생이었던 박두성은 졸업 후 맹아학교 선생이 되었고, 로제타 홀의 점자를 발전시켜 '훈민맹음'을 만들어 보급하였다.

1920년 로제타 홀은 동대문 병원장으로 다시 서울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1921년 7월, 제물포에 부인병원을 세워 여성과 어린이를 치료하며 인천과 경인지역의료 발전의 기초를 세웠다. 오늘날 인천기독병원에는 로제타 홀이 세웠던 인천부인병원의 역사가 있다. 인천기독병원은 로제타 홀이 세운 유일한 병원으로 그 터를 지키고 있으며 역사적 자료들이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 자료들은 그녀가 인천지역 의료 발전에 이바지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로제타 홀의 남편, Dr. 제임스 홀과 어린 딸 이디스는 평양에서 이질로 사망했다. 그런데 그녀는 남편과 딸이 사망했던 도시 평양을 떠나지 않았다. 평양은 아픈 기억을 계속 생각나게 하는 곳이었을 텐데도 20여 동안 평양 사람을 치료했던 그녀의 모습에 평양 사람들은 '오마니'라는 표현으로 화답하였다. 당시 기자들은 신문에 Dr. 로제타 홀의 삶을 소개하며 “조선의 은인” “맹인의 은인”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녀가 조선을 떠날 때, 언론은 그녀의 삶을 “43년간의 공헌”이라 말하며 “조선의 은인”이라고 서술하였다.

로제타 홀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헌신에 감사하며, 영원히 기릴 것처럼 표현하였다. 로제타 홀이 의료, 교육, 장애인복지, 그리고 여성의 삶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이처럼 한국 근대사와 의료역사에 큰 흔적을 남긴 로제타 홀에게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 어떠한 감사의 표현을 한 적이 없다.

이에 '로제타 홀 기념관'은 로제타 홀의 공적을 기리며 다가오는 '보건의 날'에 국가가 국민훈장을 추서해 주는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이 일을 위해 기념관은 지난 3년 동안 훈장 추서 청원을 계속 진행했고, 지난해에는 배준영 국회의원의 도움을 받아 국회에서 로제타 홀의 공적을 알리기 위한 심포지엄을 열었다. 그 후, '로제타 홀 기념관'은 보건복지부에 훈장추서청원을 다시 신청했다. 이제 그 열매가 맺어져 인천시민과 한국 사회 안에서 로제타 홀을 기억하는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강경신 로제타 홀 기념관 관장∙인천기독병원 원목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