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근우 인천연구원 도시사회연구부 연구위원
▲ 남근우 인천연구원 도시사회연구부 연구위원

민족은 상상이 된 것이다. 민족을 근대 이후 중앙집권적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창조된 상상이 된 공동체라고 주장한 베네딕트 앤더슨의 말이다. 에릭 홉스봄의 언어를 빌리면 민족은 '만들어진 전통'이다.

이와 달리 우리 사회에서 한민족이라는 단일민족 의식은 절대화된 자기 최면적 힘을 지녔다. 우리는 한민족을 고조선으로부터 시작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상이 된 것이 아니라 실체로 믿고 접근한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론도 사실 근대적 발전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한민족은 구한말 제국주의와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 그리고 통일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단일민족 정체성은 위기를 극복하고 사회통합을 위한 동원과 동질성이 강조된다. 우리 사회에서 한민족이라는 용어가 힘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물론 한반도에 거주하는 우리 민족은 비교적 혈연적으로 동질하다. 홉스봄조차 한반도를 동질적인 인구로 구성된 역사적 국가의 희귀한 사례로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민족을 혈연적 공동체로 접근할 때와 정치적 공동체로 접근할 때다. 전자로 접근할 때는 정치적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역사보다 더 먼 역사까지 혈연성을 강조하는 집단적 역사기억이 만들어진다. 반면에 후자로 접근할 때는 현재의 정치공동체가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지가 강조된다. 분명한 것은 혈연적으로 동일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정치적 측면의 역사적 기억이 다르다는 것이다. 남과 북은 정치적으로 다른 국가다.

최근 북한은 민족 지우기를 공식화했다. 작년 연말 개최한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남북한을 적대적 국가관계로 규정했다. 지난 15일 개최한 최고인민회의에서는 선대부터 이어진 80년간의 남북관계의 종지부를 선언했다. 후속조치로 헌법 개정을 통해 남한을 적대국으로 규정하기 위한 영토규정을 신설할 것을 예고했다. 즉각적인 조치로 남북회담과 협력을 담당하던 관련 기구도 폐지했다. 또한 '삼천리금수강산', '8천만 겨레'와 같이 민족을 의미하는 용어 사용조차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북한 애국가 가사의 변화가 예상되는 대목이다. 향후 사회적으로 남한과 한민족을 떠올릴 수 있는 표현은 더욱 강력하게 제재될 것 같다.

북한의 정책변화는 김일성, 김정일 선대의 민족에 기초한 통일 유훈과 협력정책을 '과거시대의 잔여물'로 간주하고 남한의 흡수통일과 북한의 연방제 통일 모두를 거부한 것이다. 이제 남북관계는 전쟁 중인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 관계로 접근하겠다는 속셈이다.

북한의 민족론 폐기는 민족으로 접근한 우리의 대북정책 역시 남북관계 개선을 견인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정책적 오판에 대한 솔직한 성찰을 필요로한다. 그동안 진보와 보수정부는 기능주의에 기초한 협력정책으로 북한 비핵화를 견인해 한반도 평화와 통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가능할 것으로 봤다. 그러나 남북 모두 민족에 기초한 협력은 서로 다른 목적을 지닌 동상이몽에 불과했다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제 민족에 기초한 우리의 협력정책은 북한 비핵화에 실패했다는 점을 인정하자. 북한도 민족대단결에 기초한 선대의 정책을 포기했다. 지금의 남북관계는 혈연성에 기초한 민족 내부의 관계가 아니다. 핵을 갖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핵이 없는 대한민국 간에 정치적으로 적대하는 국가 간 갈등관계다. 이제 우리의 한반도 정책은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가 아닌 국가와 국가의 정치적 관계에 기초한 정책적 변화를 모색할 때다. 국제사회는 두 개의 코리아를 수용한 지 오래다. 민족에 기초한 한반도 정책은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 그렇다고 혈연성에 기초한 협력과 통일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남근우 인천연구원 도시사회연구부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