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우리나라 첫 시외전화로는 1900년 7월 한성∼인천 간 개통이 꼽힌다. 그만큼 개항(1883년) 후 인천의 위상을 살필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인천시 자료를 보면, 경인 간 최초 전화 개통지는 중구 경동 화신양복점 건물이라고 기록한다. 1898년 1월 인천∼한성 간 전화선을 가설하고, 2년 뒤 시외전화를 개통했다고 확인한다. 이어 1902년 3월엔 인천전화소를 설치해 시내전화 업무를 총괄하고, 6월엔 인천∼한성 간 자석식 전화 12회선을 깔아 교환 일을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백범 김구 선생이 자서전 <백범일지>에 적은 시외전화 일화는 흥미롭다. 그는 이미 1897년 8월 인천까지 전화가 가능했다고 썼다. 당시 인천이 국내 정세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임을 감안해 주요 관청 간 긴급 연락을 취한 듯하다. 결국 국모보수(國母報讐)를 감행한 백범의 생명을 구하고자 했던 고종의 결단은 이 시외전화를 통해 실행으로 옮겨졌다. 인천감옥에 수감돼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백범을 살릴 수 있었던 '시외전화 통화'가 회자되는 이유다.

전화기의 애초 이름은 덕률풍(德律風). 1882년 조선 정부에서 청나라로 파견했던 기술자들이 들여와 그렇게 불렀다. 영어 텔레폰(Telephone)을 중국식 소리로 딴 명칭이다. 일제는 식민지 통치수단의 하나로 해방 전까지 전국 주요 도시에 이들 전화의 선을 속속 가설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일상과 비상사태 시 연락할 '물건'으로 전화기만한 게 없어서다. 1905년 즈음에만 전화기 사용처가 한성 50곳, 인천 28곳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1919년 쯤엔 교환수를 거치지 않고 미두취인소 인천∼한성 간 직통 선을 까는 등 지역의 전화 활용이 치솟았다고 한다.

인천시립박물관이 다음 달 25일까지 기획특별전 '덕률풍, 마음을 걸다'를 개최한다. 140년 넘게 전화가 우리 일상에 어떻게 다가왔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다. 시립박물관은 국내 전화 역사를 돌아보며 순종의 전화 상례(喪禮)를 알린다. 순종은 1919년 아버지 고종의 장례를 치른 후 덕수궁에 혼전(魂殿)을 차리고, 왕릉에 직통 전화소를 설치해 수시로 전화를 걸어 문안을 올렸다.

요즘은 개인 휴대 전화기가 보편화한 시대다. 30여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자유로운 통화가 어디까지 기술개발을 이룰지 예측을 불허한다. 벽돌만했던 휴대전화의 크기는 2000년대 들어 '핸드폰'이라 불릴 정도로 작아졌다. 박물관 측은 통화 외에 수많은 기능을 탑재한 지금의 '스마트폰'으로 오기까지 급변한 전화기들도 아우른다. '전화기의 변신은 무죄다'란 말이 실감나는 자리다.

▲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