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성현 전 매일노동뉴스 대표
▲ 부성현 전 매일노동뉴스 대표

이순신 장군 3부작 '명량' '한산' '노량'을 영화관에서 봤다. '아직 신에겐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와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는 법'처럼 주옥같은 대사도 좋았지만 '이 쌓인 원한들을 어찌할꼬'가 최고의 명대사였다.

류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조선은 죽은 백성만 100만명 이상이고, 농업국가였던 조선의 경작지 66%가 유실되는 피해를 보았다.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조선 역사는 200년 만에 끝났을지 모른다. 30년 후 정묘·병자호란을 겪으며 조정은 두 파로 나뉘었다. 명과 청 대치 상황에서 약소국으로서 안녕을 추구했던 주화파 최명길과 국운이 기운 명에 의를 다하고 청과 대적하자는 성리학 이념에 집착한 척화파 김상헌이 두 파의 수장이었다.

임진왜란은 외면상 조선이 승리한 전쟁이다. 병자호란은 조선 임금이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박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굴욕을 겪으며 항복했다. 패자 유구무언이지만 김상헌은 청나라에 잡혀가면서 유명한 시조를 남겼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그때나 지금이나 시절은 하 수상하다. 새해 첫 출근 날 야당 대표는 테러를 당했다. 인권유린이자 반사회적 범죄고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검찰 출신 대통령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안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난 일이라 더욱 끔찍하다. 언론은 사회적 감시자로서 권위를 잃었다. 언론은 문명의 발전과 함께 해왔다. 당대 역사를 지켜보고 기록하는 사관이자, 문명의 변화와 발전을 견인했다. 그런 언론의 가치가 테러당했다고 본다면, 또한 이번 사건이 언론의 선정성과 편향성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 한다면 무리한 억측일까.

야당 대표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런데도 자작극이라느니 헬기 특권 소동 등이 뉴스 헤드라인을 잠식하면서 피해자가 피의자로 전락하는 요지경 세상이다. 제1야당 대표가 이 정도 대접받는데 목소리가 매력적이던 배우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얼마나 억울했을까.

1년 9개월 새 우리나라는 도대체 어떤 상태에 이른 것일까. 남과 북이, 한·미·일과 북·중·러가 대적하며 긴장이 고조됐다. 용산 대통령실과 여의도 국회가, 이념과 민생이 대립하면서 정치는 형해화됐고 경제지표는 악화됐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남북은 더는 동족 관계가 아니며 적대적 두 국가관계라고 규정했다. 전쟁으로 굴복시킬 대상이라는 뜻이다. 남과 북 모두 호전적 정권을 만나니 전쟁 위기는 가시화된다. 지금 정부는 한·미·일 군사동맹에 기대를 걸지만, 미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억제할 능력을 상실했다. 그 전쟁이 해를 넘겨 계속되면서 글로벌 경제위기에 더해 4대 군사강국에 둘러싸인 한국이 지정학적 위기는 노골화되고 있다. 한국이 스웨덴이나 스위스처럼 영세중립국 지위를 보장받지 않는다면, 이순신 장군 같은 불세출의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적어도 최명길처럼 실용적 외교노선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전쟁위기는 회복불능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하 수상하다라는 표현은 한자로 다를 수(殊), 일상 상(常)을 쓴다. 몹시 다른 일상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코로나19를 겪으며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에 공감했다. 일상이라는 궤도에서 이탈한 하루하루가 1년 2년 3년 쌓여 일상이 사라졌던 시간, 전쟁과 전염병만큼 증오와 적의가 가득한 양극단의 정치가 우리가 키워온 민주주의 일상이 아님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남북이 대치하면서도 균형과 평화가 존재했던 휴전의 기간이 평화체제로 이행하진 못하더라도 2년 전 그때로 돌아가는 게 우리의 일상을 평온케 하리라.

/부성현 전 매일노동뉴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