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석원 우크라이나 키이브국립대 교수.
▲김석원 우크라이나 키이우국립대 교수

2022년 2월24일 새벽 5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날로 우크라이나 역사에 오래도록 기록될 것이다. 소련 시절에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가 종종 형제삼국이라 불렸다. 나라명도 오래전에는 소러시아, 백러시아, 대러시아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제는 철천지원수가 되었지만, 세 나라에는 아직도 많은 친인척이 분포되어있다. 언어도 비슷하여 3국 사람들은 통역 없이 이해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어느 나라나 힘든 역사적 순간이 있지만 우크라이나는 그야말로 수난과 고난의 역사였다. 10∼12세기 드니프르강변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키이우 공국은 13세기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했고 그 후 주변의 폴란드, 리투아니아, 헝가리, 터키, 러시아의 침략과 지배를 받으며 독립 국가를 이루지 못했다. 그나마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는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로부터 땅을 할양받아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형성했다. 그러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며 우크라이나는 독립국이 되었다. 국민 92% 이상이 찬성한 우크라이나 독립은 희망차고 유럽의 일원으로 잘살 수 있는 나라를 건설하려는 온 국민의 염원이 있었다.

그 염원은 오래가지 않았다. 러시아의 침략으로 23개월째 전쟁을 하며 성탄절과 연말연시에도 공습경보가 울리고 우울하고 어두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수도 키이우에는 빈 아파트가 많고 사람이 사는 집에도 전등이 흐리고 가로등도 많이 꺼져 있어 거리가 음산하다. 전선과 가까운 동남부에 비하면 키이우는 그래도 상황이 나은 편이다. 전선과 가까운 도시에는 전기, 가스, 온수가 끊긴 곳이 많아 전쟁의 공포와 더불어 추위와 싸우는 생존 전쟁을 겪고 있다.

올 새해는 아무런 폭죽 없이 맞이했다. 예전에는 아파트 공터 여기저기서 폭죽을 터트리고 샴페인을 들고 새해를 축하하며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이 뒤엉켜 인사했는데 올해는 공습경보라도 울릴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2023년 마지막 날을 보내고 2024년 새해를 맞이했다.

젤린스키 대통령의 신년사는 간결하고 명료했다. 평화, 자유, 승리의 세 단어로 압축되었다. 모든 사람이 제자리로 돌아와 평화롭고 자유로운 일상을 회복하며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의 평화와 자유가 깨지면 그다음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몰도바, 폴란드, 루마니아 발트 3국 등 전 유럽이 위험에 빠질 것이며 러시아의 독재자는 영구집권을 바탕으로 계속 침략을 꾀할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최전선에서 피를 흘리는 것이다.

2022년 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몰아낼 절호의 기회가 있었다. 헤르손과 하리키우를 탈환했을 때 미국과 유럽은 더 많은 전투기와 무기를 지원했어야 했다. 우크라이나군은 사기가 충천했으며 나라를 찾겠다는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여러 전선을 돌파했다. 그러나 제공권을 빼앗기고 무기가 달리며 전선은 굳어졌고 러시아군은 점령지를 요새화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했으며 오히려 간헐적으로 요충지를 공격하고 있다.

이렇게 전쟁을 오래 끈다면 우크라이나는 굴욕적인 휴전협상장에 나올 수도 있다. 노회한 푸틴 전술에 말리고 미국과 유럽의 도움이 약화 된다면 우크라이나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올해는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여러 나라의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데 트럼프가 재집권한다면 이 전쟁은 불을 보듯 뻔하다.

연말부터 연초까지 우크라이나 전역에는 하루 5∼6차례씩 공습이 있었다. 무섭고 슬픈, 불꽃놀이 하듯 아파트 위로 벌건 화염이 날고 폭음이 들렸다. 올해는 공습경보 좀 없었으면 좋겠다. 또 한해 2024년을 맞으며 어찌 보면 우크라이나 땅에서 서럽고 우울하게 새해를 맞이하지만, 새해에는 이 땅에 평화와 자유 그리고 종전의 소식이 들리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김석원 우크라이나 키이우국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