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를 찾아 떠난 두 남매의 길고 험난한 여정
▲ 영화 '안개 속의 풍경' 중 불라와 알렉산더 남매가 나무를 향해 걸어가는 장면.

“안개 속에 멀리 있는 나무가 안 보이니?”

오레스테스는 쓰레기 속에서 필름 조각을 발견하고는 그걸 빛에 비춰본다. 불라는 아무리 자세히 봐도 텅 빈 필름 조각일 뿐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자 오레스테스는 사실 자신도 안 보인다며 농담이었다고 말한다. 불라의 남동생 알렉산더는 오레스테스에게 필름 조각을 달라고 하고 그걸 소중히 간직한다.

영화 '안개 속의 풍경'(1988)은 타냐 파라올로구, 미칼리스 제케 주연에 그리스 거장 테오 앙겔로풀로스(Theo Angelopoulos)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로드 무비이다. 이 영화는 감독의 '침묵 삼부작' 중 세 번째 편으로 '신의 침묵'을 주제로 한다.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은 영화 세계를 시적인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호평을 받으며 베니스 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했다.

▶두 남매의 눈을 통해 본 비정하고 삭막한 세상 풍경

매일 밤 기차역에 오는 불라(타냐 파라올로구)와 알렉산더(미칼리스 제케) 남매는 독일행 열차 앞에 서서 탑승을 망설이다가 또 열차를 놓친다. 다음 날 또다시 독일행 열차 앞에 서 있던 남매가 용기를 내서 열차에 탑승하면서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두 남매는 아빠가 독일에 계시다는 엄마의 말만 믿고 아빠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생아라는 걸 숨기기 위해 엄마가 꾸며댄 거짓말이었다. 외삼촌과 경찰의 대화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불라는 거짓말로 치부하며 여정을 계속 이어간다. 영화는 아빠를 찾아 독일로 가는 두 남매의 길고 험난한 여정을 보여주며 그들의 눈을 통해 본 비정하고 삭막한 세상 풍경을 담아내었다. 어두운 밤, 남매는 결혼식 피로연에서 울며 뛰쳐나오는 신부와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는 말을 목격한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말이 죽자 알렉산더는 울음을 터뜨린다. 한편 유랑극단 보조요원인 오레스테스를 만난 남매는 공연할 극장을 구하지 못해 거리를 배회하는 유랑극단 단원들의 쓸쓸한 모습을 목격한다. 오레스테스는 시대가 변했다고 한탄하며 극장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한다. 길을 떠나는 남매, 알렉산더가 지쳐 주저앉는다. 불라는 하는 수 없이 차량을 얻어 타려고 손을 흔들고 트럭 운전사가 남매를 태워준다. 그리곤 트럭 운전사가 불라를 강간한다. 상처와 충격을 입은 불라는 아빠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만둘까 고민한다. 오레스테스를 또 우연히 만난 남매는 오레스테스의 오토바이에 올라타고 바닷가로 간다. 불라는 오레스테스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첫사랑 오레스테스가 동성애자임을 알고는 가슴 아파한다. 오레스테스의 품에 안겨 한참을 흐느껴 울던 불라는 알렉산더의 손을 잡고 여정을 계속 이어간다. 독일행 열차 승차권을 구매하기 위해 불라는 군인에게 매춘을 시도한다. 군인은 담배를 피우며 망설이다가 돈을 놓고 그냥 가버린다. 처음으로 승차권을 구매해 열차에 탄 남매는 순조롭게 독일로 가는가 싶었는데 여권이 없어서 도중에 열차에서 내린다. 밤중에 배를 타고 국경을 넘으려던 남매는 국경수비대에게 들킨다. 국경수비대는 남매를 향해 총을 쏜다.

어느덧 아침이 밝아오고 안개가 자욱한 풍경 속에서 저 멀리 나무가 한 그루 희미하게 보인다. 독일에 도착한 남매는 안갯속에서 나무를 바라본다. 남매는 나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옛날이야기를 되새기며… “태초에 어둠이 있었어. 태초에는 어둠만이 있었는데 그 후에 빛이 만들어졌지….”

/시희(SIHI) 영화에세이시스트